러블리 본즈 The Lovely Bones (2009)

2010.02.11 18:57

DJUNA 조회 수:12216

 

전 피터 잭슨이 왜 앨리스 시볼드의 [러블리 본즈]를 각색할 생각을 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천상의 피조물들]의 감독이니까요. [천상의 피조물들]은 피터 잭슨에게 일종의 예술적 알리바이였습니다. 그가 괴상한 컬트 영화뿐만 아니라 정통적인 드라마에도 재능이 있는 감독이라는 증거였죠. 그가 그런 증명의 기회를 다시 한 번 잡으려 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두 작품은 소재 면에서도 유사하지 않습니까? 둘 다 예민하고 섬세한 미성년자 소녀가 끔찍한 살인과 연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에 앨리스 시볼드의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을 것입니다. 소설 [러블리 본즈]는 결코 [천상의 피조물들]과 같은 영화의 원작이 될 수 없는 작품입니다. 아니, 제대로 된 영화화 자체가 까다로운 작품입니다.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정통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쉽지 않아요.

 

왜일까요? 설정을 보세요. 이 소설은 14살 때 이웃에 사는 연쇄살인마에게 무참하게 성폭행당하고 살해당한 소녀가 내세에서 살아남은 가족들과 친구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드라마와 판타지가 적당히 섞인 게 [천상의 피조물들]스럽습니다. 하지만 아니에요. 여기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 판타지와 드라마 중간에 선 주인공에게는 주어진 가장 큰 역할은 나레이션입니다. 살아있을 때 사랑하던 사람들 주변을 맴돌면서 그들이 어떤 일들을 겪는지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죠. 다시 말해 이 소설의 드라마를 그대로 시각화하면 주인공인 수지 새먼은 살해 이후 거의 사라져 버립니다. 그녀는 드라마 속의 캐릭터가 아니라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피터 잭슨은 이 사태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대신 자연스럽지만 결코 옳지 않은 해결책을 취했습니다. 판타지를 확장시킨 것이죠. 잭슨은 소설에선 가볍게 언급되고 지나가는 내세의 묘사를 잔뜩 부풀렸습니다. 세계의 규칙을 정하고 이름을 붙이고 컴퓨터 그래픽을 잔뜩 동원해서 그 세계의 환상성을 묘사했어요. 그 때문에 제작비도 엄청 들었겠지요. 물론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니까 그 세계 안에서 수지 새먼이 할 수 있는 역할들도 늘렸습니다.

 

아마 이런 변형을 통해 원작이 하지 못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여전히 원작이 들려주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린 딸의 죽음 이후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지요. 이들의 입장은 모두 중요합니다. 심지어 이들에게 그런 상처를 안겨준 살인마의 입장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수지 새먼의 천국이 부풀자 이들의 이야기는 축소되었습니다. 갈등은 평면화되거나 사라졌습니다. 영화 속의 수지 새먼은 나레이터로서 최선을 다하지만 관객들에게 이 이야기는 허겁지겁 진행되는 요약본처럼 보입니다. 그럼 천국은 자기 역할을 하나? 아뇨, 그것은 바탕 없는 컴퓨터 그래픽 눈요기에 불과합니다. 실체가 없는 것이 너무 무겁고 큽니다.

 

여기서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야기만 줄어든 게 아니라 주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죠. 앨리스 시볼드의 소설은 어느 쪽도 인공적으로 편들지 않는 냉정한 현실세계를 다루었습니다. 주인공들은 결국 살아남지만 그건 시적 정의가 실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동안 그들이 더 강해지고 현명해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잭슨과 일당들에 의해 재구성된 이 세계에서 수지 새먼의 영혼은 지상에서 모든 정의가 이야기의 규칙에 맞게 실현되었기 때문에 해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건 앨리스 시볼드가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독립적으로 떼어놓고 봐도 무척 싼 이야기입니다.

 

영화 [러블리 본즈]에는 자기만의 장점들이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훌륭하고, 잘 캐스팅된 배우들의 호연도 만족스럽지요. 하지만 이 작품은 여전히 피터 잭슨 최대의 실패작입니다. 그가 [러블리 본즈]를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킹콩] 이후 형성된 블록버스터 마인드를 재조율하기 위한 소품으로 만들었다면 좋았겠지만... 어쩌나요. 그는 그 마인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이 영화를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있을 수 있는 실수죠. 하지만 여전히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10/02/11)

 

★★

 

기타등등

서점 장면을 보면 [반지의 제왕] 세트가 전시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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