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 림 Pacific Rim (2013)

2013.07.10 17:35

DJUNA 조회 수:26913


기예르모 델 토로의 [퍼시픽 림]은 영화 제목이 나오기도 전에 수백 번은 들은 것 같은 설정에서 시작됩니다. 환태평양지진대의 깊은 곳에 있는 차원 통로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다괴물 '카이주'가 나와 인근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이들과 맞서기 위해 지구인들이 제작한 건 25층 높이의 거대로봇 예거. 이 로봇은 너무 거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조종할 수가 없어요. 로봇과 뇌신경이 연결된 두 명의 파일럿이 각각 로봇의 좌반구와 우반구를 맡아서 조종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두뇌는 하나로 연결되어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지요. 이걸 드리프트라고 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롤리 베켓은 그런 예거 파일럿 중 한 명입니다. 원래는 형과 같은 팀이었는데, 카이주와 싸우는 동안 형을 잃었지요. 그가 파일럿을 그만 두고 떠돌던 5년 동안 지구인과 카이주의 전쟁 상황은 점점 끔찍해집니다. 새로 튀어나오는 카이주는 예거의 이전 공격에 적응되어 있고, 이제 남아있는 예거도 얼마 없는 데다가, 높은 사람들은 예거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그 돈으로 태평양 주변에 벽을 쌓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지요. 이들을 이끄는 스태커 팬트코스트는 남아있는 예거로 마지막 도박을 하려 하고, 옛 기종 예거를 조종한 경험이 있는 유일한 파일럿인 롤리를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롤리의 새 파트너가 된 사람은 카이주에 대한 복수로 불타는 모리 마코입니다. 

[퍼시픽 림]은 여러 모로 뻔뻔한 영화입니다. 어린 시절 일본 거대 로봇 만화와 괴수 영화들을 보면서 자랐던 중년의 덕후가 자신의 팬심을 2억짜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터트린 겁니다. 이런 상상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겠지만 그 상상을 진짜로 실현할만큼 설득력있게 미친 사람은 아직까지 델 토로밖에 없지요.  [트랜스포머] 시리즈요? 음, [퍼시픽 림]은 그 시리즈와 덕후질의 차원이 다릅니다. 특히 일본 관객들이나 거대 로봇 나오는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은 환장하겠더군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치고는 인간들의 이야기는 좀 심심한 편입니다. 롤리, 마코, 펜트코스트와 같은 인물들은 그냥 전형적이죠. 이들에게 인간적인 드라마를 넣어주기 위해 삽입된 드리프트도 의도만큼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하는 것 같고요. 인간보다는 거대로봇과 괴물들의 레슬링이 훨씬 더 중요한 영화입니다. 하긴 영화의 의도를 생각해보면 이건 오히려 정상이라고 해야겠군요.

그렇다고 이 영화에 델 토로의 개성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드리프트를 통해 마코의 어린 시절 경험이 드러나는 장면만 해도 순수한 델 토로죠. 저 같은 사람은 '[벌집의 정령]의 영향력이 사람들과 문화를 거치면서 엉뚱하게 이렇게 터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답니다. 러브크래프트와 고질라가 반반씩 섞인 세계관 역시 델 토로스럽고요. 전 이럴 거라면 호러 효과를 조금 더 넣는 게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중도를 지키는 게 맞는 일이었을 겁니다. 물론 론 펄만도 나옵니다.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카메오 수준이긴 하지만요.

남은 건 거대로봇과 괴물들의 대결인데, 될 수 있는 한 아이맥스로 보시기 바랍니다. 3D는 큰 의미가 없지만, 두 괴물의 산더미 같은 부피를 감상하려면 될 수 있는 한 스크린이 큰 게 좋죠. 덕후들에게 이들의 격투는 순수한 오르가즘을 주겠지요. 단지 대부분 밤장면이고 하나는 물 속 장면이라 액션은 어둡습니다. 어두운 화면이 CG 티가 덜 나긴 하는데, 요샌 이것도 큰 문제는 아닌 터라, 꼭 기술적 문제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이야기의 분위기에 충실한 것처럼 보여요. 전통이라면 전통일 수도 있고. 그래도 액션을 보는 동안 계속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해독'해야 하는 문제점은 있습니다.  

[퍼시픽 림]은 소수의 관객들에게 특화되어 있는 대중영화입니다. 모든 관객들을 만족시킬 의무가 있는 2억 짜리 블록버스터지만 무게 중심과 방향은 일본 애니메이션과 특촬 영화에 환장하는 덕후들에게 기울어져 있어요. 이 정도면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이 영화를 진짜로 즐길 수 있는 관객들은 장난감 로봇과 괴물 장난감을 하나씩 쥐고 격투기 놀이를 해 본 기억을 잊은 적이 없는 애어른들이겠지요.  (13/07/10)

★★★

기타등등
장난감들은 네카에서 나올 거라고 합니다. 토이저러스에서는 못 사겠군요.


감독: Guillermo del Toro, 배우: Charlie Hunnam, Rinko Kikuchi, Idris Elba, Charlie Day, Burn Gorman, Max Martini, Robert Kazinsky, Clifton Collins Jr., Ron Perlman, Mana Ashida

IMDb http://www.imdb.com/title/tt1663662/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6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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