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종사 Yi dai zong shi (2013)

2013.08.25 13:16

DJUNA 조회 수:18851


왕가위의 [일대종사]의 주인공은 이소룡의 스승인 무술고수 엽문입니다. 몇 년 전에 견자단이 같은 캐릭터를 연기한 [엽문]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고 이는 곧 시리즈화 되었죠. 이 정도면 뒷북일 수도 있겠지만 왕가위의 스타일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엽문]의 아류작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고 얼마 전에 나온 영화를 보니 실제로 그랬습니다.

왕가위의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이 영화도 캐릭터에 따라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우선 주인공 엽문이 있습니다. 무림고수 궁보산과 그의 딸인 궁이가 있고요. 팔극권의 달인인 일선천도 있어요. 왕가위 영화에서 종종 그렇듯, 이들의 관계는 종종 생뚱맞습니다. 특히 영화를 다 보고 일선천이 왜 나와야하는지 이해하는 관객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중간에 궁이와 잠시 만나는 장면을 제외하면 완전히 따로 노니까요.

영화의 시선을 끄는 것은 액션입니다. 왕가위는 이 영화에서 일반적인 중국어권 무술영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액션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단지 그건 왕가위가 정말 독창적인 액션감독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무술영화에서 일부러 회피하는 테크닉을 자기 스타일에 맞추어 쓰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이렇습니다. 일반적으로 무술배우나 댄서처럼 몸의 움직임을 중요시하는 사람의 움직임을 잡을 때에 영화는 될 수 있는 한 전체 몸의 움직임을 끊김없이 보여주는 쪽을 택합니다. 프레드 아스테어 출연 영화들이 대표적인 예죠. 하지만 왕가위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갑니다. 액션은 거의 모양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짧게 끊고 클로즈업을 잔뜩 쓰죠. [와호장룡]의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주인공에게 액션을 할 수 있는 큰 배경을 제공해준다면 [일대종사]의 시네마스코프는 길고 좁다란 화면 속에 주인공들을 가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 관객들이 볼 수 있는 건 배우들의 액션이 아니라 배우들의 움직임을 재료의 일부로 쓰고 있는 폭력의 이미지입니다. 배우들의 무술보다 '시네마'가 먼저인 영화죠. 적어도 무술 장면에서는 그렇게까지 배우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이 그런 한계를 뚫고 나오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특히 궁이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기차역 장면이 그렇죠.

액션보다 더 일탈적인 부분은 스토리를 꾸리는 방식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20세기 중반 중국을 무대로 한 무술영화는 강한 국가주의적인 성향을 갖게 됩니다. [엽문]부터가 일본인들을 무술로 패는 영화죠. 하지만 [일대종사]에서는 그런 장면이 전혀 없습니다. 엽문은 일본군에 소극적으로 저항하지만 무술로 맞서지는 않습니다. 그저 집과 재산을 빼앗긴 무력한 가장이 되어 숨고 도망칠뿐이죠. 이 영화의 무술은 국가주의 메시지를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구체적인 목표를 위해 무술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런 걸 하는 사람들이에요. 당연히 무술의 목표나 의미는 그들이 모여 만든 작은 세계를 떠나지 못합니다. 주인공 엽문을 제치고 가장 큰 드라마를 챙긴 궁이도 그런 면에서는 예외가 아닙니다.

이러니 무술 액션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중간에 그 장르의 굴레를 깨고 자연스럽게 왕가위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처치해야 할 최종 악역은 없고, 무술고수는 별 것 아닌 조무라기들만 패고, 마지막에 합이라도 한 번 맞추어봐야 할 것 같은 주인공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잔뜩 피곤해진 채 넋두리나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심술궂은 재미가 느껴질 지경입니다. 저 같으면 만들면서 키득거리며 웃었겠지만 왕가위는 그냥 자연스럽게 자기 스타일을 따라간 것이겠죠.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만들어놓은 세계로 회귀한 것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중국 각지의 무술 달인들이 1960년대 홍콩, 즉 왕가위네 동네로 모이면서 끝나니까요.

배우들은 언제나처럼 참 좋습니다. 액션 장면에 그렇게 배우를 배려해준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배우의 역할과 무게감은 만만치 않죠. 영화 속 양조위와 장쯔이에게는 클래식 할리우드 시절의 고전 스타들에서 느낄 수 있는 아우라가 있습니다. 둘 중엔 장쯔이 쪽이 조금 더 빛을 발하는데, 무술 연기에 보다 능숙하고 드라마가 더 큰 이점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이 원래 좋은 배우이고 부인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 스타이기 때문이겠죠. (13/08/25)

★★★☆

기타등등
중요한 장면에 꼭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데보라의 테마]를 쓸 필요가 있었는지. 유명한 곡이라서 음악이 나오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도 그걸 무시하고 보면 먹히긴 합니다. 모리코네의 음악은 언제나 먹히죠.


감독: Kar Wai Wong, 배우: Ziyi Zhang, Tony Leung Chiu Wai, Cung Le, Chen Chang, Woo-ping Yuen, Siu-Lung Leung, Jin Zhang, 송혜교, 다른 제목: The Grandmaster

IMDb http://www.imdb.com/title/tt146290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9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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