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Vojna i mir (1966)

2019.04.29 00:22

DJUNA 조회 수:5216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전쟁과 평화]는 꽤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일단 80년대에 우르르 수입된 소련 영화 중 하나였어요. 축약판이었지만요. 하지만 MBC에서 미니 시리즈 버전을 상영했고 스펙트럼에서 DVD도 나왔습니다. 최소한 세 번은 본 셈이죠. 이번에 나온 건 2017년에 나온 디지털 복원판입니다. 곧 크라이테리언에서 블루레이를 낼 거라고 하더군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인기있는 이야기이고 지금도 꾸준히 각색되고 있습니다. 요새는 주로 텔레비전 시리즈로 각색되지요. 어쩔 수가 없는 것이, [안나 카레니나]와는 달리 [전쟁과 평화]는 두 시간 길이로 축약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킹 비더의 [전쟁과 평화]도 208분이나 되었습니다. 영화 두 편 분량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허둥지둥 달려가는 것 같습니다.

본다르추크의 [전쟁과 평화]는 킹 비더의 [전쟁과 평화]에 자극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가장 위대한 러시아어 소설로 여겨지는 작품이 할리우드에서 먼저 각색되었으니 소련 사람들의 자존심이 망가졌죠. 스케일이나 내용 모두 할리우드 버전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당시 소련에서나 가능했던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국책영화가 만들어진 것이죠. 7시간 분량의 4부작 영화요. 척 봐도 일단 수익을 생각해야 하는 할리우드 버전과는 스케일이 다릅니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고 화려하지요. 전쟁 장면도 그렇지만 나타샤의 첫 무대회만 봐도 할리우드 영화에 서너 배는 더 곱한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좋은 영화일까요? 글쎄요.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도 받고 인기도 있었지만 국내외로 평이 계속 오락가락했어요. 일단 너무 대놓고 만든 소련 국책 영화잖아요. 할리우드 영화의 종교적 감상주의는 없지만 과한 애국주의로 불끈거립니다. 이게 톨스토이의 비전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나치게 뻣뻣한 각색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고,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열정없이 딱딱하다고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60년대 당시 미국에서 본 평론가들은 더빙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어요. 지금 관객들과는 상관 없는 요소입니다만.

제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가 그렇게 기계적인 각색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대사나 내레이션이 톨스토이의 원작에서 나왔고 역시 많은 장면이 톨스토이가 쓴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지만 그렇게 평탄한 각본은 아니에요. 영화의 흐름은 소설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몇십 분 동안 한 장면을 집중적으로 그리기도 하고 다른 장면들은 언급도 없이 건너뛰기도 해요. 그리고 영화는 후반에 접어들수록 점점 대사가 줄어듭니다. 1812년의 전쟁과 그로 인한 혼란을 그린 후반부는 드라마를 반쯤 포기하고 톨스토이가 언어를 통해 그린 사건을 국책영화의 어마어마한 스펙터클로 재구성하는 시도입니다. 그 결과 나온 것은 종종 엉뚱한 부분이 초점이 가 있고 정신 없고 혼란스러우며 가끔 이게 뭔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어마어마한 광기의 질주입니다. 축약판에서는 아무래도 이 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이건 줄거리를 따라 압축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니까요.

앞으로 한동안 나올 수 없는 영화입니다. 텔레비전 시리즈 시도는 계속 되겠지요. 얼마 전에 나온 앤드루 데이비스 버전도 있었고요. 기다리다보면 러시아 사람들이 더 나은 걸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요. 더 나은 배우들이 더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최신 기술로 소련 시절 동원되었던 어마어마한 인력을 커버할 수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그런 결정판이 나온다고 해서 구소련의 이 어마어마한 괴물이 가진 거친 힘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아무래도 이처럼 뻔뻔스럽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요. (19/04/29)

★★★☆

기타등등
1. 중간중간에 나오는 러시아어 통역은 없앨 수 없었던 걸까요? 4부에 꽤 긴 프랑스어 대사가 통역 없이 나오는 걸 보면 그게 꼭 필요한 것도 아닌 듯한데요.

2. 자막 번역이 아주 나빴어요. 번역자가 대사를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종종 헛갈리는 거 같았습니다.


감독: Sergey Bondarchuk, 배우: Sergey Bondarchuk, Lyudmila Saveleva, Vyacheslav Tikhonov, Boris Zakhava, Anatoli Ktorov, Anastasiya Vertinskaya, Antonina Shuranova, Oleg Tabakov, 다른 제목: War And Peace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63794/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875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