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카이폴 Skyfall (2012)

2012.10.23 19:58

DJUNA 조회 수:31470


제임스 본드를 '현대화'하려는 시도는 몇십 년 전부터 있어왔지만 대니얼 크레이그가 나온 세 편의 007 영화처럼 이를 과격하게 시도한 작품들은 없었죠. 이는 창작자의 개성의 반영이 아니라, 리부팅의 의지가 깔린 사업적인 판단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그 증거로, 크레이그의 007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이전의 피어스 브로스넌 007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들과 거의 일치하고, 개성에 예술적 일관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선장도 보이지 않습니다. 순전히 뭔가 다른 것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이런 변화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지금까지 나온 제임스 본드와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언 플레밍의 본류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기형적 존재라는 말은 아닙니다. 첫 번째 영화인 [카지노 로얄]만 해도 지금까지 나온 007 영화들 중 원작에 가장 충실한 작품이었지요. 그리고 최신작인 [007 스카이폴]은 이 시리즈가 전통을 완전히 버리지 않을 계획임을 선언하는 작품입니다.

[스카이폴]의 줄거리는 어느 시대 007 영화의 줄거리여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표준적입니다. 이스탄불에서 기밀정보가 든 하드 디스크 회수 임무에 실패한 제임스 본드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실 동쪽 어딘가에서 방탕한 휴가를 즐기고 있었죠. 하지만 그 하드디스크를 입수한 정체불명의 악당이 MI6 본부를 폭파하고 전세계에 암약하는 요원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시작하자 본드는 다시 임무수행을 위해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국적인 도시를 돌아다니며 미녀들을 만나고 악당에게 잡힙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지금의 제임스 본드 개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시리즈 본류로 돌아가려는 의지입니다. 한 동안 버려두었던 전통이 하나씩 돌아오기 시작해요. 일단 Q가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60년대식 비밀무기 장난감 같은 건 만들지 않으며, 그런 스파이 영화의 전통을 오히려 놀림감으로 삼습니다. 그러는데도 영화는 후반부에 고전적인 스파이 영화 가젯 하나를 당당하게 등장시켜 역습을 하기도 하죠. 이런 식의 대화는 또다른 고정배역이 자기 자리를 찾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같으면서도 계속 조금씩 다른 거죠.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007 영화의 전통과 현실세계를 연결시키려는 시도입니다. 이는 제임스 본드의 모험담보다 MI6 를 현대화하려는 정부와 맞서는 M의 드라마에서 더 두드러지지요. 테니슨의 [율리시스]를 인용하며 구식 스파이 인력이 새로 바뀐 국제정세에서 얼마나 필요한지 외치는 M의 연설은 대영제국의 지금의 모습과 겹쳐져 거의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어디선가 에드워드 엘가의 교향곡이 들려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런 고풍스러운 취향은 영화의 스토리 전체에 스며들어있습니다. 단순히 5,60년대 스파이 영화의 취향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으로 돌아가요. 007 시리즈의 기본 공식 스토리를 중반에 마무리 지은 뒤 벌어지는 M과 제임스 본드의 여정은 퇴위를 앞둔 늙은 여왕과 그 옆에서 여왕을 수호하는 방탕하고 지친 기사의 이야기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당장에라도 바스커빌의 사냥개들이 단체로 튀어나올 것 같은 스코틀랜드의 황무지와 버려진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것이죠. 이 부분은 마치 해머 영화 세트에서 찍은 서부극 같기도 합니다.

아마 007 시리즈 사상 가장 괴상한 악당 중 한 명일 라울 실바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또 다른 구식 세계로 들어갑니다. 이번엔 가짜 가족이 등장하는 멜로드라마죠. M을 중심으로 한 실바와 본드의 갈등은 거의 삼각관계이며, 이들은 엄마의 애정을 두고 다투는 아들들 같습니다. 특히 실바의 마지막 행동은 상징과 비유를 훌쩍 넘어버리죠.

이런 상황 안에서 크레이그의 본드가 균형을 잡아가는 모습은 거의 서커스를 보는 거 같습니다. 여전히 그는 제임스 본드의 역할을 잘 안 맞는 새 양복을 입는 것처럼 연기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양복과 몸이 서로에 맞추어 길들여지는 과정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적절한 타협을 하는데, 그러는 동안 골수팬들이라면 "배반이야!"를 외칠 만한 상황 코미디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골수팬과는 거리가 먼 저 같은 관객들은 '취향이야 변할 수 있지'하고 쿨하게 넘길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제임스 본드가 아니라 M입니다. [여왕 폐하의 007]이나 [카지노 로얄]과 맞먹을 정도로 개인적인 영화지만, 본드는 여전히 차갑고 단선적이죠. 하지만 M은 냉정한 외피 밑에 격렬한 갈등을 품고 있는 장엄한 캐릭터입니다. 주디 덴치를 M역에 캐스팅한 것이 처음엔 정치적 공정성을 집어넣으려는 잔꾀였을지 몰라도, 지금 와서 보면 그냥 신의 한수입니다. 배우 하나로 이렇게 많은 게 달라 보이다니 참 신기하죠. (12/10/23)

★★★☆

기타등등
제가 많이 싫어하는 007 영화의 징크스가 여기에도 나옵니다. 개연성 문제는 없습니다만 이렇게 꾸준하게 등장시킬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감독: Sam Mendes, 출연: Daniel Craig, Judi Dench, Javier Bardem, Naomie Harris, Ben Whishaw, Ralph Fiennes, Bérénice Marlohe, Albert Finney, Ola Rapace

IMDb http://www.imdb.com/title/tt1074638/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0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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