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SF를 하나 봤어요. 제목은 [Per Aspera Ad Astra]. 라틴어 경구죠. 직역하면 '역경을 넘어서 별까지'. 보통 '고난 끝에 영광' 정도로 의역됩니다. 직역하면 상당히 멋있는 우주배경 SF 제목이잖아요. 왜 이 제목을 가진 SF가 이렇게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정작 이 제목을 고른 이 작품은 고난 끝에 다른 별에 도착하는 내용이 아니거든요. 제목과 내용이 그렇게 잘 맞지 않습니다.

당시 소련에서 아주 인기있었던 키르 불리체프라는 SF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바탕을 둔 작품입니다. 때는 23세기. 푸시킨이라는 지구 우주선이 버려진 외계 우주선을 발견해요. 모두 클론이었던 승무원들은 다 죽었지만 여자 한 명만은 살아있었죠. (영화는 왜 이 외계인들이 지구인들과 똑같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런 세계를 다룬 구식 SF인 거죠.) 탐사대의 리더인 레베데프는 외계인에게 니야라는 이름을 붙이고 집으로 데려오는데, 니야는 염력과 같은 초능력을 갖고 있지만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잃었습니다.

지구의 삶에 적응해가던 니야는 점점 기억을 되찾고, 자신이 데사라는 외계 행성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마침 데사로 가는 아스트라라는 우주선이 한 대 있었고 레베데프의 아들 스테판도 그 우주선의 승무원이었죠. 니야는 우주선에 숨어서 데사로 가는데, 데사는 환경주의/반자본주의 팜플렛을 위해 디자인한 것 같은 곳입니다. 사악한 자본주의자들의 탐욕 때문에 환경이 완전히 망가져 더 이상 마스크 없이는 숨도 쉴 수 없는 곳이 되었죠.

익숙한 소련 SF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지구는 공산주의 혁명을 완성해서 유토피아가 되었고 대부분 사람들이 경치좋은 피서지스러운 곳에서 삽니다. 그보다 상태가 좋지 못한 외계행성은 문명 진화의 밑 단계에 위치하며 살아남으려면 진취적인 지구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그렇게까지 재미있는 작품이라고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제가 본 건 감독의 아들이 영화의 시각효과를 손보고 새 사운드트랙을 입힌 뒤 노골적인 공산주의 선전처럼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버전인데, 그래도 그렇게 속도가 잘 붙지는 않아요. 느릿느릿하고 말만 많은데 아이디어 자체도 그렇게까지 새롭거나 인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니야를 연기한 옐레나 메트욜키나의 독특한 미모인데, 이것만으로는 빈약한 스토리를 극복하긴 어렵습니다.

평균적인 소련 시절 SF 영화의 견본을 보고 싶으신 분들, 공산주의 시절 사람들이 어떤 미래를 꿈꾸었는지 궁금한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재미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당시 영화의 순진무구함이 향수를 자극하기도 하니까요. (17/06/19)

★★☆

기타등등
앞에 말했지만 소련판은 두 가지가 있어요. 오리지널 극장판과 2001년에 나온 '복원판'. 미국에서는 한 시간 정도가 잘려나간 [Humanoid Woman]이라는 제목의 더빙판이 나왔고 [Mystery Science Theater 3000]의 에피소드에서 다루어졌다고 합니다.


감독: Richard Viktorov, Nikolai Viktorov, 배우: Yelena Metyolkina, Uldis Lieldidz, Vadim Ledogorov, Yelena Fadeyeva, Vatslav Dvorzhetsky, Nadezhda Semyontsova, Aleksandr Lazarev, Aleksandr Mikhajlov, Boris Shcherbakov, 다른 제목: To The Stars By Hard Ways, Per Aspera Ad Astra

IMDb http://www.imdb.com/title/tt0126237/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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