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페리아 Suspria (2018)

2019.05.02 23:33

DJUNA 조회 수:11068


꽤 오랫동안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피리아]를 리메이크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원작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전 리메이크를 기다렸죠. 물론 오리지널 [서스피리아]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각본이 너무 엉망이고 대충이고 얼렁뚱땅이잖아요. 분명 이 이야기가 가진 가능성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길이 있을 겁니다. 그 길을 찾는다고 해서 아르젠토의 [서스피리아]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아닐 거고요.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게 바로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피리아]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기대와는 참 먼 영화였어요. 기대와도 멀고 아르젠토의 영화와는 더 멀었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1977년, 수지 배니언이라는 미국인이 베를린에 옵니다. 유명한 마르코스 무용단에서 오디션을 보려고요. 합격한 수지는 단번에 주연 자리를 차지하는데, 그 무용단은 아무래도 마녀 소굴인 것 같습니다. 무대가 되는 건물이 검은 숲이 아닌 베를린 시내에 있고 발레학교가 현대무용단이 바뀌었지만 스토리는 대충 맞는 거 같죠?

그런데 아닙니다. 구아다니노의 영화는 아주 이상한 실험을 했어요. 아르젠토의 영화에서 1970년대 독일은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70년대는 그냥 현재였고 독일은 '옛날옛적 머나먼 나라'였습니다. 그냥 호러 영화를 위한 이국적인 배경이었죠. 하지만 구아다니노는 원작의 등장인물들을 1977년대 베를린으로 옮겨 놓고, 만약 이들이 이 시대, 이 공간에 살았다면 어떤 사람이었을 것이고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를 상상합니다. 이제 독일은 더 이상 머나먼 나라가 아니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나치 시절의 죄의식을 감추고 있고 적군파가 테러를 일으키는 구체적인 역사 속 공간입니다. 그리고 구아다니노는 이 영화를 진지하게 독일 영화로 만들었어요. 원래 이탈리아 영화쟁이들은 전유럽을 자기네 앞마당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1970년대 독일을 문화적으로 보다 진지하게 접근하며 진짜 독일 영화로 만들려고 했다는 티가 납니다.

전 이게 좀 과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열심히 노력하고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한 티가 나는 각본이에요.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을 역사와 시대 상황이 자꾸 막습니다. 물론 다 의미가 있긴 하겠지만 이것들을 엮기 시작하면 좀 영화 전체가 좀 숙제처럼 되어 버려요. 한두 개 힌트를 던지면서 암시만 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았을까요. 관객들도 적극적으로 해석할 여유 공간이 있어야 하잖아요. 무엇보다 호러 영화의 기능과 드라마의 흐름이 더 중요하고요.

그런데 재미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원작보다 한 시간이 더 긴 어처구니 없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없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고는 말을 했지만 의미없는 실험은 아닙니다. 호러의 밀도가 낮은 편이지만 자극이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전 일단 클라이맥스, 반전, 결말까지 이어지는 흐름이 좋았습니다. 원작의 빈약한 이야기를 보완하고 적당히 새로운 방향으로 끌어가는 재미있는 각본이었어요. 원작과는 달리 무용을 진지하게 쓰고 호러 효과와 드라마에 반영한 것도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배우들과 캐릭터들이 훨씬 좋았지요. 배우들을 비명지르고 피를 흘리는 마네킹처럼 썼던 아르젠토의 영화와는 전혀 달랐어요.

두 영화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좋을까? 글쎄요. 그건 정말 의미없는 질문 같습니다. 두 편의 [서스피리아]는 극단적으로 달라요. 두 영화의 장단점을 정리해보면 겹치는 게 거의 없을 거고 둘을 나란히 놓으면 일부러 그런 것처럼 아귀가 딱 맞을 겁니다. 전 일단 아르젠토의 영화를 먼저 보시고 구아다니노의 영화를 보시길 권합니다. 둘 다 100 퍼센트 만족스러운 영화는 아니겠지만 연달아 보면 꽤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겁니다. (19/05/02)

★★★

기타등등
1. 이 영화를 [서스페리아]로 기억하는 관객들이 몇이나 될까요. 왜 [서스페리아]라는 제목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요. 심지어 이 영화에서는 제목 설명이 더 자세하게 나온다고요.

2. 오래간만에 만나는 안젤라 빙클러. 실비 테스튀드도 짧게 나오고 코치 중 한 명은 알렉 웩입니다. 배우들이 잘 쓰였나와는 별도로 캐스팅이 재미있어요. 틸다 스윈턴의 일인삼역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감독: Luca Guadagnino, 배우: Dakota Johnson, Tilda Swinton, Chloë Grace Moretz, Malgorzata Bela, Angela Winkler, Alek Wek, Mia Goth, Elena Fokina, Ingrid Caven, Sylvie Testud

IMDb https://www.imdb.com/title/tt1034415/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5155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