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은 원래 대만 기반 LGBTQ+ 전문 OTT 플랫폼인 GagaOOLala가 제작한 미니시리즈입니다. 20분 정도 짧은 에피소드 6회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장편영화로 재편집이 가능했던 거죠.

20대 후반의 유부녀인 주인공인 이밍은 지인의 결혼식에 갔다가 고등학교 시절 배구부 후배였던 팅팅을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둘은 그 뒤로 만나면서 조금씩 다시 가까워지고 그러는 동안 회상장면들이 끼어들죠. 팅팅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밍을 사랑하고 있었고 이밍은 팅팅에 대한 자신의 감정, 자신의 성적지향성에 대한 의문을 모두 부정해왔습니다. 그러다 10년만에 다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 거죠.

티끌하나 없는 것 같은 정갈한 환경 속에서 중간중간에 너무나도 대만 청춘물스러운 회상이 섞여 들어가는 예쁘장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90년대 할리우드라면 [위험한 정사]류의 스릴러가 될 수 있는 소재를 품고 있지요. 이미 남편과 아들이 있는 여자에게 고등학교 후배가 찾아와 집착하기 시작한다면 무서운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게 아닙니다. 팅팅은 이밍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이밍이 그 표준적인 이성애 결혼 생활에 맞지 않다는 걸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거죠.

영화는 이밍이 원래 가려던 결혼식과 레즈비언 결혼식을 착각하면서 시작되는데, 이건 영화의 테마와도 이어집니다. 고정된 이성애 세계와 그 세계관의 강요는 거기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억압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죠. 두 주인공이 10년만 젊었어도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이밍의 이성애 관계를 무조건 부정하느냐.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요.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영화는 이성애 가족이 얼마나 가부장이 아닌 가족구성원에게 덫이 될 수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그 역할을 가장 충실하게 하는 도구가 이밍의 남편이죠. 이 사람은 처음 등장 때는 그냥 무개성적으로 무매력이다가 점점 더 재수가 없어지는데, 그 재수없음이 무지 무개성적입니다. 판 게시판에 나오는 남편 욕들을 모아 붙인 것 같달까요. 이밍이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끼는 데에는 굳이 성정체성의 억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이면 팅팅이 그 대안으로 등장해 깔끔하게 상황이 정리될 수도 있는데, 영화는 그렇게 쉬운 길로 안 갑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두 사람의 상황은 정리되지 않아요. 오히려 더 복잡해지고 힘들어지죠. 결혼은 여전히 방해물이고 자폐 스펙트럼에 있는 아들도 가볍게 넘길 수 없습니다. 팅팅과는 달리 이밍은 여전히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시즌제 텔레비전 시리즈의 전개 방식이죠. 결말 역시 1시즌 마지막회의 클리프행어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팅팅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는 이밍의 태도는 분명 영화에 의미있는 결말을 줍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속편을 기대하겠지만요. (23/01/06)

★★★

기타등등
2시즌이 나온다고 합니다. 25분짜리 에피소드 12부작이라고 하는데, 이건 극장에 걸릴 수 있을까요?


감독: Angel Ihan Teng, 배우: Zaizai Lin, Lyan Cheng, Lee Yi, 다른 제목: Fragrance of the First Flower

IMDb https://www.imdb.com/title/tt15655018/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21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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