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탄적일천 Hai tan de yi tian (1983)

2022.01.11 21:00

DJUNA 조회 수:2297


[해탄적일천]을 개봉 첫 날, 텅 빈 아트하우스관에서 혼자 보고 왔습니다. 검색해 보면 같은 날 본 사람도 많던데 서울 바깥 영화관이라서 그랬던 걸까요. 그래도 여전히 수도권인데.

에드워드 양의 장편 데뷔작입니다. 소위 대만 뉴웨이브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고요. 전 있다는 것만 간신히 알고 있었던 영화입니다. 아마 이 감독의 영화 중 가장 통속적인 작품일 거예요. 20세기 중후반 동아시아에서 나왔던 여성서사 연속체 어딘가에 위치해있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경요에서 박완서, 김수현으로 이어지는 멜로드라마의 영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치고는 러닝타임이 길고 접근법이 아트하우스 영화에 가깝습니다.

해외에서 성공한 피아니스트 웨이칭이 대만으로 돌아오면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콘서트 당일날, 옛 남자친구의 동생인 지리가 연락을 해와요.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해주지요. 듣다 보면 왜 이런 이야기를 시간도 없는 사람에게 이렇게 길게 들려주는 건지 궁금하기도 한데.

지리의 이야기는 경제 성장기의 중상층 동아시아 여성의 삶이 얼마나 공허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표준 같습니다. 경제적 문제는 별로 없어요. 하지만 억압적인 가부장제의 압력은 숨이 막힙니다.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걸 본 지리는 아버지에게서 달아나 자기가 직접 고른 남자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이게 답이 아니라는 건 곧 분명해져요. 지리의 문제는 남자를 선택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어느 날 남편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스러운 수상쩍은 상황 속에서 사라집니다.

아트하우스 영화스러운 접근법이 이야기를 실제보다 크고 모호하게 보이게 하지만, 영화가 3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관객들과 주인공을 굴리면서 낸 결론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남자는 여자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되고 여자에게 결혼은 빠져나와야 살 수 있는 덫입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여자 인생에서 남자를 제거하는 과정의 기록이고, 그 결과 여자들의 삶은 모두 전보다 나아집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된 웨이칭부터 그래요. 지리의 오빠랑 결혼했다면 그냥 피아노 선생에 머물렀을 사람이라고요. 주인공 지리 역시 예외는 아닌데, 웨이칭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여준다는 액자 구조도 지리의 변신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술적으로만 보았을 때, 영화는 그 액자보다는 남편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고 지리가 해변을 방문한 그 날에 집중하는 게 맞거든요.

당연히 로맨스 영화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건 다행스럽습니다. 이 영화는 이성애 로맨스 영화의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남자들이 없거든요. 가족 위에 군림하는 가부장 독재자인 지리의 아버지 같은 사람은 예상대로 대놓고 혐오스럽습니다. 하지만 지리의 남편, 오빠 기타 등등의 남자들도 매력없고 따분한 건 마찬가지거든요. 무엇보다 같이 나오는 여자들과 비교했을 때 외모 격차가 심각한 수준이예요. 일부러 그렇게 캐스팅한 것 같긴 한데 또 모르죠.

거의 40년 전 영화지만, 낡은 느낌이 별로 없는 작품입니다. 물론 대사, 대사 처리 같은 것에 옛 시대의 느낌이 있는데, 그래도 멜로드라마와 아트하우스 영화적 터치 모두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종종 어리둥절한 조합도 여전히 재미있고요. 그 옛 시대의 느낌도 낡았다기보다는 그 시대 기록의 일부처럼 보이죠. 무엇보다 영화가 그리는 7,80년대 타이페이의 모습은 여전히 세련되었어요. 동시대 한국 영화가 서울을 어떻게 그렸는지 보고 한 번 비교해보세요. (22/01/11)

★★★☆

기타등등
허우 샤오시엔이 대사 없는 단역으로 나옵니다.


감독: Edward Yang, 배우: Sylvia Chang, Ming Hsu, David Mao, Terry Hu, 다른 제목: That Day, On The Beach

IMDbhttps://www.imdb.com/title/tt0085635/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16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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