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의 하루 (2020)

2021.12.22 01:13

DJUNA 조회 수:1837


임현묵의 [소설가 구보의 하루]의 주인공인 구보는 일종의 문학적 공공재입니다. 이 이름의 캐릭터가 맨 처음 등장하는 작품은 박태원의 1934년작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었지요. 그 다음에 1970년대 초에 최인훈이 쓴 연작단편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나왔고, 1995년엔 주인석의 연작단편집 [검은 상처의 블루스 -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가 나왔어요. 세 작품에서 구보는 그 시대 한국어권 남성 문학가들의 사유와 그들의 권태로운 삶을 담아내는 틀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이 사람이 영화 주인공이 된 것이죠. 임현묵은 전에도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오마주한 [서울, 2016년 겨울]이라는 단편을 만든 적 있다니, 20세기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목을 보고 기대할 법한 내용입니다. 가난한 소설가 구보가 얼마 전에 쓴 단편소설 원고를 들고 서울 시내, 정확히 말하면 을지로와 종로 사이를 방황합니다. 출판사 편집자도 만나고, 동생도 만나고, 중간에 서울극장에서 영화도 한 편 보고, 문학계 영감들의 술자리에도 머물고 그러다 대학로로 가서 친구가 연출하는 연극 연습을 구경하기도 합니다.

앞에 소개한 [구보] 소설들과 비교하면 결정적인 차이가 두 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 모두가 단점이에요.

가장 큰 문제점은 소설 주인공 구보와는 달리 영화 주인공 구보는 영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우린 구보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없어요. 거의 전부가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소설들과는 달리 영화는 어떤 독백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구보를 연기한 박종환의 연기를 통해 이 사람이 어떤 기분인지 읽을 수 있을 뿐이지요. 다른 내용의 영화라면 이래도 됩니다. 하지만 주인공 이름이 구보라면 곤란하지요.

두 번째 문제점은 동시대성의 부재입니다. 소설 주인공 구보는 모두 '현대인'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시대를 살고 있었고 그 시대와 상호작용하면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고민했지요. 그런데 영화 주인공 구보에게는 그런 동시대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인물을 읽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지요.

영화는 급변하는 시대에 맞서 자신의 속도에 맞추어 사는 남자를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동원된 재료들은 모두 엉망이에요. 예를 들어 구보는 4백자 원고지에 손으로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그것까지는 이해가 돼요. 각자의 집필방법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김훈도 아니고, 겨우 30대후반인 작가가 손으로 쓴 원고를 편집자에게 덜컥 내미는 건 무례하고 어처구니 없는 짓이지요. 영화엔 구보의 동생이 필름 카메라를 고수하는 오빠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지적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역시 좀 어이가 없습니다. 요새 필름 카메라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힙스터들이니 말이죠. 여기에 '시대에 맞지 않는 순문학을 고수한다'는 구보의 고집이 더해지면 캐릭터는 더 지루해집니다. 영화의 구보는 소위 '고뇌하는 남성 문학가'의 옛 클리셰로만 구성된 기성품이에요. 영화가 진행될수록 진지하게 여기기가 어려워집니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홍상수의 영향, 적어도 홍상수가 먼저 선점한 묘사들이 보입니다. 하지만 홍상수 영화의 재미는 없지요. 적어도 우리는 홍상수가 그리는 예술가들이 어떤 부류인 지 압니다. 홍상수 같은 사람들이겠지요. 그리고 아무리 비슷비슷한 술자리가 반복되어도 김민희나 홍상수역 남주가 뭔가 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지루함과 권태만 있습니다. 사실적인 묘사겠지만, 굳이 그것만 보여주는 영화를 우리가 일부러 챙길 필요가 있을까요. (21/12/22)

★★

기타등등
우연이었지만 이 영화를 본 날, 저의 동선이 영화 속 구보의 것과 거의 겹쳤어요. 을지로에서 시작되어 종로를 거쳐 대학로에서 끝났으니까요.


감독: 임현묵, 배우: 박종환, 김새벽, 기주봉, 문창길, 류제승, 다른 제목: Sisyphus's Vacation

Hancinema https://www.hancinema.net/korean_movie_Sisyphus__s_Vacation.php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201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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