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세계를 지배했다]는 1956년에 로저 코먼이 만든 극저예산 SF 호러 영화입니다. 여러 이유로 악명 높은 작품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여전히 자주 상영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수준높은 작품은 아니지만 자기만의 매력이 있지요.

스토리는 흔한 냉전시대 SF입니다. 금성에서 온 외계인이 지구인들을 노예로 삼으려 해요. 이를 위해 금성인은 지구인 과학자인 톰 앤더슨과 무선으로 접촉합니다. 인류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앤더슨은 모든 구질구질한 감정을 지워 지구를 유토피아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에 넘어갑니다. 지구에 도착한 금성인은 지구의 모든 기계들을 정지시킵니다. 그리고 동굴에 숨어 박쥐 모양의 생명체를 한 마리씩 날려 지구인들을 세뇌시키지요.

이 이야기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에 대해서는 몇 페이지에 걸쳐 떠들 수 있습니다. 일단 제목부터 틀렸어요. 금성인 괴물은 지구를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시골 동네 동굴에 숨어 지구인 몇 명을 죽였을 뿐이에요. 지구 전체의 기계를 정지시켰는데, 도착한 건 단 한 명. 그리고 제대로 된 무기도 없어서 지구인의 원시적인 무기에 죽죠. 이게 뭐냐고. 하지만 이 당시 코먼 영화에서 논리를 따지는 건 부질없는 일입니다.

노력하면 진지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톰 앤더슨의 인류에 대한 환멸은 충분히 이해가 가잖아요. 금성인이 그 환멸에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는 스토리라인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듭니다. 생각해보면 얼마 전에 휴고상을 받은 [삼체] 1권도 이런 이야기였어요. [그것이 세계를 지배했다]처럼 유치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비하면 앤더슨과 대립하는 폴 넬슨은 50년대 미국인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우리 편이지만 하는 짓은 앤더슨보다 훨씬 꼴보기 싫어요. 일단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예요. 외계인에게 세뇌된 아내를 가차 없이 총으로 쏴죽이는 모습을 보면 좀 소름끼칩니다. 그 때문에 지금 관객들에겐 50년대 매카시즘을 비난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죠. 의도는 절대로 아니었지만.

괴물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이 영화의 금성인은 로저 코먼의 아이디어에 바탕을 둔 디자인으로 괴물 장인 폴 블라이스델이 만들었지요. 후반부에 괴물의 전신이 드러나자 관객들이 다들 웃어서 블라이스델이 실망했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괴물은 꼭 엎어놓은 아이스크림 콘에 게 앞다리를 달아놓은 것처럼 생겼거든요. 게다가 너무 작고 둔하고 허약해보여요. 나중에 로저 코먼은 다음부터 괴물을 최소한 여자배우보다는 크게 만들어야겠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지금의 관객들이 이 영화를 좋아한다면 태반은 괴물 때문입니다. 진지함을 포기하고 보니, 괴물의 우스꽝스러움은 귀여운 매력이 되어버렸지요.

의외로 캐스팅이 좋습니다. 리 반 클리프와 피터 그레이브스. 다들 당시엔 무명이었지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도 시치미 뚝 떼고 진지한 이들의 연기입니다. 아, 딕 밀러도 작은 역으로 나옵니다. 세 번째 코먼 영화인가 그랬을 거예요. (20/04/19)

★★☆

기타등등
1966년에 [Zontar, the Thing from Venus]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습니다. 이 작품도 만만치 않게 저예산입니다.


감독: Roger Corman, 배우: Peter Graves, Lee Van Cleef, Beverly Garland, Sally Fraser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49370/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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