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호러블 닥터 히치콕]은 바바라 스틸의 대표작 중 하나지만 제가 찾지 못해 애를 먹었던 영화입니다. 그러다가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보니 DVD가 나왔더라고요. 그래서 냉큼 챙겨서 봤습니다.

며칠 전에 소개한 [죽음의 긴 머리칼]처럼 영어권 영화인 척하는 이탈리아 호러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이라는 로버트 햄튼은 사실 리카르도 프레다, 각본가인 줄리안 페리는 에르네스토 가스탈디. 조연으로 나오는 이탈리아 배우들 상당수도 영어 이름을 쓰고 있지요.

타이틀롤인 버나드 히치콕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외과의사입니다. 그는 막 발전하기 시작한 마취의학의 선두주자로 이 분야에서 전설과 같은 인물입니다. 단지 그에게는 심각한 문제점이 하나 있습니다. 구제불능의 시체애호증 환자라는 것이죠. 그는 아내 마르게리타를 마취한 뒤 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합니다. 아내의 동의를 구하고 하는 게임이니 남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마취는 위험한 일. 결국 아내는 그 부작용으로 죽어버립니다. 상심한 그는 저택을 가정부에게 맡기고 도시를 떠나요.

몇 년 뒤 그는 새 아내 신시아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옵니다. 예상하시겠지만 신시아의 신혼생활은 끔찍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정부는 쌀쌀맞기 그지 없고 저택엔 기분 나쁜 검은 고양이가 돌아가니고 밤엔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초상화에서 본 마르게리타와 비슷한 그림자가 돌아다닙니다. 무엇보다 남편 버나드 히치콕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주인공 이름을 히치콕이라고 지은 건 익살스러운 경고문입니다. 이 영화의 내용은 최소한 세 개의 히치콕 영화를 짜깁기한 것 같거든요. 수상쩍은 중년 남자와 결혼에서 무서운 가정부가 지키고 있는 저택에 온 여자 이야기는 [레베카]입니다. 남편이 자신을 살해할 거라고 믿는 여자 이야기는 [의혹]이고요. 하나 더 있는데, 이건 스포일러라 제목을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찾으면 얼마든지 더 나올 거예요.

단지 영화는 이를 고딕 영화의 전통에서 보다 변태스럽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히치콕이 은밀하게 숨겨 놓았던 어두운 욕망의 힌트를 꺼내 그대로 펼쳐놓는 것이죠. [현기증]에서 시체애호증은 그래도 상징적이었죠. 하지만 이 영화의 버나드 히치콕은 정말로 시체와 섹스하고 싶어합니다. 이보다 어이가 없는 건 첫 번째 결혼생활에서 그는 아내를 통해 정말 그의 욕망을 충족시켰다는 것입니다. 리카르도 프레다와 에르네스토 가스탈디가 어디까지를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새 아내 신시아와 버나드 히치콕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파국은 이 시대 영국 성역할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만 읽기엔 한계가 많은 텍스트이긴 해요. 일단 여자주인공 신시아가 무지 수동적이니까.

깊이 있는 분석보다는 센세이셔널리즘에 기대고 있고 막판엔 멜로드라마의 관습에 빠지는 영화지만 그래도 [더 호러블 닥터 히치콕]은 근사한 구경거리입니다. 이 영화가 총천연색으로 그리는 악몽은 이탈리아 호러답게 뻔뻔스럽고 천박하기 그지 없으면서도 종종 기괴하게 아름다워요. 물론 이 아름다움의 중심에는 바바라 스틸이 있어요. 단지 시체음란증이 판을 치는 변태스러운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스틸의 캐릭터가 너무 정상이고 나약하다는 건 불만. 이 영화에서 신시아는 도대체 몇 번이나 기절을 하는 건지요. 80분의 러닝타임 동안 살아남은 게 신기할 정도예요. 몸이 너무 허해서 건드리지 않고 지켜봐도 그냥 죽을 거 같더라고요. (15/04/07)

★★★

기타등등
고양이 제저벨이 막판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안 나오는데, 그냥 눈치껏 살아남았을 거라고 믿으렵니다.


감독: Riccardo Freda, 배우: Barbara Steele, Robert Flemyng, Silvano Tranquilli, Maria Teresa Vianello, Harriet Medin, Al Christianson, Evar Simpson, Nat Harley, 다른 제목: L'Orribile segreto del Dr. Hichcock

IMDb http://www.imdb.com/title/tt005631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