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듀크 오브 버건디]. 그러니까 부르고뉴 공작. 무척 남성적으로 들리는 제목이죠. 감독 피터 스트릭랜드는 일부러 반대되는 이름을 고른 게 분명합니다. 하여간 제목이 가리키는 '듀크 오브 버건디'는 나비 이름입니다. 주로, 영국, 스페인, 스웨덴 같은 나라에 서식하는데 요새는 수가 줄고 있다고 해요.

영화의 제목은 주인공의 직업,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이 사는 특별한 세계와 연결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1번 신시아는 인시류 전문 곤충학자입니다. 아니, 신시아뿐만 아니라 신시아가 속해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그런 것 같습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분류학과 관련된 발표를 하고 마치 음악감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 곤충들이 내는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듣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한데, 계속 들어가면 점점 더 이상해집니다. 일단 이 세계엔 남자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아요. 어린이도, 청소년도 없고요. 자동차도 없어서 다들 걷거나 자전거로만 다녀요. 시대배경은 대충 20세기 중후반처럼 보이는데 그 역시 확실치 않습니다. 과연 이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고 어떻게 유지되는 것일까요? 전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를 굴려봤지만 답을 얻을 수 없더군요. 의외로 SF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신시아와 에블린이라는 여자의 관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 보면 신시아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고용주 같고 에블린은 겁먹고 연약한 하녀 같습니다. 신시아는 에블린에게 온갖 모욕적인 요구를 하고 조금이라도 결과가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처벌합니다. 그런데 그 처벌이라는 것이... 아니, 하여간 이게 겉보기 같지가 않습니다. 다음 날이 되면 이런 행동 대부분은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반복되는 걸요. 그리고 신시아는 이 모든 대사들이 적힌 카드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지배/복종 역할극을 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이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에블린입니다.

스트릭랜드의 전작 [버베리안 스튜디오]가 70년대 이탈리아 지알로 영화의 제작과정을 담고 있다면 [더 듀크 오브 버건디]는 70년대에 유럽에 많이 나왔던 야한 영화들을 흉내내고 있습니다. 나중에 인터뷰를 보니 그는 원래 헤수스 프랑코의 영화 [엑소시스트 로나]를 리메이크하려던 작업에 참여했다가 빠진 뒤로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스트릭랜드의 영화는 선배들과 방향이 많이 다릅니다.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두 주인공들이 변태적인 욕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파멸하는 과정을 그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더 듀크 오브 버건디]에서는 그런 식의 이야기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단 신시아와 에블린의 행동은 변태적이지 않습니다. 아까 말하려다 빼먹었는데 스트릭랜드가 그리는 이상한 세계는 동성애와 DS 역할극이 모두 정상인 곳이에요. 심지어 이들이 사는 마을엔 역할극을 위한 특별한 가구를 만드는 전문가도 하나 있는데 장사가 엄청 잘 되는 모양이고 굳이 다른 고객의 이름을 감출 생각도 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이 세계에서 그냥 평범한 고민을 안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인 겁니다.

신시아와 에블린의 이야기에는 코미디와 드라마가 자연스럽게 공존합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상한 세계의 전복된 상식, 그 세계에서 이들이 벌이는 행동들은 모두 웃깁니다. 하지만 영화는 두 사람의 캐릭터에 대해 진지하기 짝이 없어요. [더 듀크 오브 버건디]는 관계의 위기를 맞고 있는 두 연인의 심리를 그 주제에 맞는 무게감을 얹어 그리는 진지한 드라마입니다. 역할극하면서 노는 사람들이라고 고민이 없으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에블린의 요구는 어떻게 봐도 정도가 좀 심해요. 자신이 더 사랑하는 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무리한 요구를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지배/복종 역할극과 실제 캐릭터의 역학 관계, 코미디와 드라마가 얽히면서 영화가 만들어내는 다중나선은 의외로 씁쓸하고 애잔한 로맨스로 맺어집니다. 이런 영화에서 이런 이야기와 이런 결말을 기대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더 놀라운 건 스트릭랜드가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수많은 재료들을 아우르는 완벽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거죠. (15/05/05)

★★★☆

기타등등
1. 헝가리에서 찍었습니다. 감독이 요새 거기 산다고 하더군요. 주연배우들 중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고요. 신시아 역의 시드세 바베트 크누트센은 덴마크인, 에블린 역의 키아라 다나는 이탈리아인입니다.

2. 오프닝 크레딧에 'Perfume by Je Suis Gizella'라는 말도 안 되는 문장이 뜨는데, 그렇다고 정말 배우들이 그런 향수를 뿌렸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반응이 좋아서 영화사에선 정말 그런 이름의 한정판 향수를 만들어 사은품으로 돌렸다고 하더군요. 눅눅하고 진하고 은근히 낡은 책과 나비 날개에서 나온 먼지의 향이 섞여있을 거 같아요.


감독: Peter Strickland, 배우: Sidse Babett Knudsen, Chiara D'Anna, Fatma Mohamed, Monica Swinn, Eugenia Caruso, Zita Kraszkó, Eszter Tompa, Kata Bartsch, 다른 제목: 듀크 오브 버건디

IMDb http://www.imdb.com/title/tt2570858/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29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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