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머 데이브스의 [데스티네이션 도쿄]는 얼마 전에 이야기했던 [존 웨인의 진주만]에 잠시 나왔던 제2차 세계대전 선전 영화입니다. "할리우드 사람들이 잠수함에 대해 얼마나 알까요?"라는 뒷담화의 소재죠. 궁금해서 봤는데, [존 웨인의 진주만]보다 훨씬 좋은 영화였습니다. 더 재미있고, 캐릭터와 이야기도 더 그럴싸하고, 심지어 특수효과도 더 좋았어요. 기술이야 다 거기서 거기지만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USS 카퍼핀이라는 미국 잠수함 이야기입니다. 캐리 그랜트가 연기하는 캐시디 함장이 이끄는 이 잠수함은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알류산 열도에서 레이몬드 중위라는 인물을 태우고 일본으로 갑니다. 이들의 임무는 중반에 밝혀지는데, 그건 첫번째 일본 본토 공습(둘리틀 폭격대 공습 말입니다. 마이클 베이의 [진주만]에도 좀 나오는)을 위한 기상정보를 수집하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쟁 선전물로 제작된 잠수함 영화가 갖추어야 할 거의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영화입니다. 전쟁의 공포나 고통보다는 평범한 개개인의 영웅심이 더 강조되고 험악하고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분위기는 낙천적입니다. 당연히 나중에 나온 [유보트](이 영화는 언급을 피할 수가 없군요)와 같은 영화들의 날이 선 리얼리즘은 찾기 어렵습니다.

러닝타임이 135분으로 다소 긴 편이지만 지루한 구석은 없습니다. 늘 뭔가 하고 있어요. 코미디건, 드라마건, 액션이건, 의학드라마(!)건. 초반부는 분위기가 너무 밝아 거의 잠수함 배경의 시트콤처럼 보이지만 알류산 열도 사건 이후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는데 분위기 전환이 이해 못할 수준은 아닙니다. 그리고 일단 잠수함이 도쿄 만에 들어간 뒤로는 잠수함 영화식 서스펜스가 상당한 편이죠. 당시 나온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미군에서 직접 지원받은 클립들이 효율적으로 쓰이고 있는데 폭격 장면 같은 건 좀 오싹합니다.

캐릭터들은 2차세계대전 스테레오타이프들의 총집합입니다. 바람둥이도 있고, 19살 풋내기도 있고, 넉살좋은 주방장도 있고. 뻔한 인물들이고 이야기도 뻔하지만 그래도 선명하기 짝이 없고 공감하기도 쉽습니다. 그리고 캐시디 함장은 [존 웨인의 진주만]에 나오는 기포드보다 훨씬 좋은 함장입니다. 허구의 인물이니 능력이야 다 비슷하겠지만 그래도 더 잠수함 함장에 어울리는 인물이랄까요. 잠수함 함장이 존 웨인처럼 나대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 재미있는 건 일본 묘사죠. 당시 전쟁 선전 영화들은 적군 묘사에 분명한 하한선을 그어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건 그들의 정부이지 국민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일본 군국주의 사회에서 전쟁 기계로 길러지는 일본인들을 한탄하고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면 다음 세대 일본 아이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수 있을 거라는 다소 감상적인 연설이 나오는 거죠. 중간중간에 좌절된 민주화 시도에 대한 이야기도 가끔 언급되고. 다들 비장하지만 바탕이 되어야 할 실제 정보가 심각할 정도로 빈약해서 요새 보면 많이 웃깁니다. 일본 관객들에겐 도쿄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레이몬드 중위의 일본어 실력도 마찬가지로 웃기겠죠. (15/01/13)

★★★

기타등등
토니 커티스가 이 영화를 무지 좋아했다고 합니다. 보고 나서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해군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결국 둘 다 했어요. 2차세계대전 때 해군이었고, 나중에 배우가 되었으니까요. 2차세계대전 배경 잠수함 코미디 영화 [페티코트 작전]에서는 이 영화의 주연인 캐리 그랜트와 공연하기도 했죠.


감독: Delmer Daves, 배우: Cary Grant, John Garfield, Alan Hale, John Ridgely, Dane Clark, Warner Anderson, William Prince, Robert Hutton, Tom Tully, Faye Emerson, Peter Whitney

IMDb http://www.imdb.com/title/tt0035799/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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