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류인간 (2014)

2014.12.05 23:52

DJUNA 조회 수:5775


신연식의 [러시안 소설]에서는 소설가인 주인공 신효가 쓴 몇 편의 소설 제목이 언급됩니다. [조류인간]도 그 중 하나였어요. 그렇다고 영화 [조류인간]이 [러시안 소설] 속 소설을 그대로 영화로 옮긴 건 아닙니다. 유사성은 있죠. 사라진 아내를 찾아 다니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아내가 새와 관련된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것. 그러나 디테일은 많이 다릅니다. 전 이 영화의 주인공인 소설가 정석이 쓴 소설이 [러시안 소설]에서 신효가 쓴 소설과 정확히 같은 소설이며 신효와 정석이 사는 두 평행우주가 연관성 없이 흘러가다가 이 책에서 잠시 만났다는 아이디어를 굴리며 잠시 즐거워했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신효의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석도 15년 전에 자신과 어린 딸을 남겨놓고 사라진 아내를 찾아다닙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그는 자기를 도와주겠다는 소연이라는 여자를 만나고, 그와 같은 입장인 사람들이 만든 모임에 가입해요. 정석의 아내 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자들이 비슷하게 수상쩍은 상황 속에서 실종되었는데, 그 여자들은 모두 이은호라는 돌팔이 의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석의 이야기와는 별도로, 우린 이은호를 만나 치료의 여정을 떠나는 두 여자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약물치료와 수술을 거쳐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고 있어요. GV에서 신연식은 이 둘의 여정을 트랜스잰더의 성전환 과정과 비교하고 있더군요. 감독이 그랬다고 그 비유 하나만 가져올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아시는 게 좋겠습니다.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하지만 신연식이 이를 갖고 성공적인 영화를 만들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잘못된 예술적 선택이었다고 말하면 리뷰를 쓰는 게 더 재미있겠지만 그것도 아닌 거 같아요.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소재를 제대로 다룰만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급하게 쓴 각본이고 지나치게 급하게 만든 영화예요. 각본만이라도 조금 더 공을 들였다면 좋았을 텐데.

충분히 계획을 짜지 못한 티가 여기 저기에서 보입니다. 소연 캐릭터만 봐도 그렇습니다. 거의 매 시퀸스마다 퉁퉁 튀는 티가 나요. 영화가 끝나고 전체 계획을 알게 된 뒤에 돌이켜 봐도 그렇습니다. 캐릭터, 동기, 행동 모두 조금씩 아귀가 안 맞아요. 의도적일 리는 없고 그냥 이들을 짜맞추고 다듬을 시간이 부족했던 거죠.

다른 구석도 마찬가지.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80년대 구닥다리 순문학 단편 분위기와 장르 판타지가 섞여 있는데 조화가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히 후자가 가볍게 다루어진 것은 문제죠. 신빙성 있는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고 잘못 건드리면 영화 전체가 허물어질 것 같습니다. 의식적인 [TV 문학관]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대사의 언어가 아주 약하고요. 비사실주의 연극의 우쭐거리는 대사의 패러디처럼 들리는데 그게 많이 안 좋습니다. 연극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안 좋아요. 소설이었다면 편집 과정 중 날아갔을 것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영화 속 남자주인공에 대해 한 마디. 전 주인공 김정석이 그냥 싫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 대부분이 싫어요. 그들은 무례하고 편협하고 매력없고 무엇보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게 존대를 써야 한다는 개념 자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나마 나은 건 잠시 나오는 사냥꾼 아들 정도인데, 적어도 그는 최소한의 에티켓은 지키거든요. 한 명만 그런다면 캐릭터 묘사라고 넘기겠지만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다면 문제죠. 이건 '다른 무엇이 되려는' 그 여자들의 환경으로도 설명이 안 됩니다. 그 여자들의 조력자들도 마찬가지니까요. 감독이 이 '나이 지긋한 한국 남자'의 이미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조류인간]을 보면서 전 계속 이 줄거리와 주제를 가진 다른 영화를 상상했습니다. 적어도 보다 예의바른 주인공이 나오는, 스스로의 설정에 보다 충실한 영화를 상상했지요. 그리고 그 영화는 정말 만들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14/12/05)

★★☆

기타등등
[러시안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많은 캐릭터들이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감독: 신연식, 배우: 김정석, 소이, 정한비, 민지오, 이유미, 강신효, 다른 제목: The Avian Kind

IMDb http://www.imdb.com/title/tt3797178/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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