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2014)

2014.12.11 23:01

DJUNA 조회 수:5875


[26년]으로 다소 미적지근한 감독 데뷔를 했던 조근현이 [봄]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이 영화가 여러 국제영화제를 돌아다니며 상을 받기 시작했던 때에야 알았죠. 전까지는 전혀 정보가 없었던 영화였습니다. 뉴스와 보도자료를 읽으면서 정체가 궁금해졌어요. 암만 봐도 이 영화는 요새 영화 같지 않았으니까요.

보면서 정체가 확실해졌습니다. 정말 요새 영화 같지 않은 영화였어요. 시대배경이 1969년이라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후 영화 같았지요. 대충 80년대 중반. 회화적 화면, 고통받는 여성 캐릭터(들), 국제시장용 한국예술영화의 자의식 같은 것들을 상상해보세요. 물론 여기엔 [TV 문학관]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당시 영화의 '예술성'에서 '문학성'은 필수적인 것이었지요. 물론 당시 같았다면 그 수준의 노출은 불가능했겠지만.

예술가와 모델, 그리고 예술가의 아내 이야기입니다. 지병을 앓는 조각가가 고향 시골 마을로 내려오는데, 그의 아내는 절망감에 빠진 남편에게 창작 욕구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모델을 찾아다닙니다. 우연히 남편의 맘에 들 거 같은 시골 아낙네를 찾아낸 아내는 그 여자를 모델로 고용해요. 폭력적인 남편과 빈곤에 시달리던 그 여자는 고심 끝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요.

정말 오래된 이야기이고 그 때문에 '문학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소재지요. 이 영화의 제작자이고 각본가인 신양중 역시 그 '문학적' 뿌리를 인식하고 있었을 겁니다. 영화의 시대배경이 과거인 것도 이런 배경이 이런 식의 이야기에 더 잘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 테니까요.

굉장히 나이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이야기를 현대 배경으로 옮긴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웃을 것이고 만드는 사람들도 그 웃음에서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냉소주의를 깔겠지요. 하지만 [봄]은 그러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진지하고 순수하기 짝이 없어요. 예술과 인생에 대한 심각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이 영화 내내 장중하게 흐릅니다. 그게 정말 깊이가 있는 것인가와는 별도로 그 심각함 자체가 그만의 무게를 만들어내지요.

이야기의 중심은 박용우가 연기하는 조각가 준구지만, 캐릭터가 살아있고 또 공감하기 쉬운 건 두 여자들입니다. 이유영이 연기한 모델 인경은 가장 이해하기 쉬운 인물이죠. 얻어맞고 배고픈 사람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런 순진한 사람이 모델 일을 하면서 조금씩 예술의 힘에 눈을 뜨는 과정 역시 매력적입니다. 김서형이 연기한 아내 정숙은 보다 복잡한 인물입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 모델에 대한 동정 그리고 그 밑에 숨겨진 은밀한 성취욕까지. 이들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살려내기에 각본은 살짝 부족한 편이지만 (특히 정숙은 조금 더 연구할 필요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이유영과 김서형은 그 빈 자리를 무리없이 채워줍니다.

단지 박용우의 준구는 꽉 막혀 있습니다. 이건 '예술영화'를 목표로 삼았던 80년대 한국영화들 대부분이 갖고 있던 문제점이었죠. 학대받고 고통받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넘쳐나지만 결국 그들을 성적 판타지로 이용하고 있고 그러는 동안 자신이 속한 시스템이 가해자로서 그런 박해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슬쩍 무시하거나 그것까지 자기연민의 재료로 삼는. 정작 이들의 인생을 모아 작품을 만드는 것이 임무인 그는 이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그가 마지막에 한 일은 충분히 당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임 떠넘기기와 도망처럼 보여요.

의외로 잘 만든 영화이고 연기도 좋은데(특히 신인 이유영은 큰 수확이죠), 그래도 '올드'하다는 소리를 피하기는 어렵겠습니다. 현대관점은 시대물에서도 중요해요. 시대물을 만들면서 그 작품의 관점까지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잡으면 그건 그냥 패스티시가 되지요. [봄]이 완전히 만족할 수 없는 영화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14/12/11)

★★★

기타등등
1. 김수안 배우가 이 영화에도 나옵니다. 인경의 딸로. 이 정도면 아역계의 이경영.

2. 26년에 나왔던 배우들이 여기저기 카메오로 나옵니다. 이들은 심지어 포스터에도 이름을 박고 있는데, 전 좀 지나친 거 같습니다.


감독: 조근현, 배우: 박용우, 김서형, 이유영, 주영호, 윤예희, 안수빈, 차종호, 김수안, 다른 제목: Late Spring

IMDb http://www.imdb.com/title/tt324363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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