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어요.)

[블라이 저택의 유령]은 마이크 플래너건의 넷플릭스 시리즈 [힐 하우스의 유령]의 후속작입니다. 속편은 아니에요. 내용은 연결되지 않는데, 둘 다 귀신들린 집을 다룬 저명한 소설을 해체해서 유연하게 각색한 작품이고 배우들을 공유합니다. 이번 드라마의 무대는 영국이기 때문에 미국인 배우들의 억양을 지적하는 시청자들이 있어요. 플래너건은 첫 에피소드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지만 [힐 하우스의 유령] 때만큼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여저히 이 사람의 개성이 보여요. 특히 호러 파트에서는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원작은 헨리 제임스의 [나사못 회전]입니다. 영화와 드라마만 계산해도 35번째 각색이라고 하더군요. 경쟁작이 많지만 (올해에도 [터닝]이라는 영화가 나왔지요) 그래도 본격적으로 경쟁해야 할 작품은 우리나라에선 [공포의 대저택]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잭 클레이턴의 1961년작 [The Innocents]입니다. 비교해보면 촬영이나 미장센 상당 부분을 인용한 게 보여요. 노래도 빌려왔고요. 워낙 자주 각색되었으니 그 동안 이 어휘들이 다른 작품들에서도 공유되며 전통으로 굳어졌을 가능성도 있지만요. 참, 주인공 이름은 대니 클레이턴입니다. [The Innocents]의 감독 이름을 빌려왔지요.

얼핏보면 기본 스토리는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가정교사가 시골대저택에 사는 두 남매를 돌보러 고용됩니다. 그 남매 주변엔 귀신들이 떠돌아요. 가정교사는 아이들을 지키려고 하고요. 단지 시대배경은 1987년으로 바뀌었고, 가정교사는 미국에서 온 오페어가 되었습니다. 유령이 된 저번 가정교사는 고용주의 회사에서 자리를 노리는 변호사로, 가정교사와 스캔들을 낸 마부는 아이들 삼촌의 비서가 되었어요. 원작을 완전히 해체해서 가족 드라마로 재구성한 [힐 하우스의 유령]보다는 충실한 각색이지요. 심지어 액자 구조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2007년에 1987년 이야기를 회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요.

당연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나사못 회전]은 중편으로, [힐 하우스의 유령]보다 훨씬 짧습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지만 정작 드라마용 재료는 많지 않아요. 그리고 드라마의 시대배경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1987년은 옛날이긴 하지만 원작의 배경인 빅토리아조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지요. [나사못 회전]에서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가정교사의 행동을 자꾸 뒤트는 것은 당시 독신 여자의 억압된 성적 욕망이었습니다. 1987년을 사는 미국인 여성에게도 같은 억압을 기대하긴 어렵지요.

일단 드라마는 등장인물들을 두 명 늘렸습니다. 요리사 오언과 정원사 제이미 캐릭터가 들어갔는데, 둘 다 아주 비중이 크고 캐릭터의 깊이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원작과는 달리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꼼꼼한 스토리를 부여했습니다. 이것만으로 부족했는지 헨리 제임스의 다른 단편들에서 조금씩 재료들을 가져왔어요. 제임스 팬이라면 이 조각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할 것입니다. 아, 이 드라마 챕터 제목들은 모두 제임스의 단편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게 어느 정도 성공적인가. 각색자가 원작자로부터 자유로운 캐릭터들, 그러니까 가정부 해나 그로스, 오언과 제이미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제슬 선생과 피터 퀸트는 크게 얻는 게 없습니다. 캐릭터가 약하거나 설득력이 없다는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이 가지 않고 이야기가 특별히 끌리지 않는 거죠. 그건 고용주인 헨리 윙그레이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각본을 바꾸어도 구조상 긴 이야기가 필요없는 캐릭터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가정교사를 억압할 것인가? 적어도 최종 버전에서 드라마는 원작과 완전히 다른 해결책을 택했습니다. 동성애요. 이건 논리적인 선택입니다. 20세기 후반 젊은 미국인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극단적으로 억누르고 있다면 동성애는 논리적인 대안이지요. 그리고 드라마는 이를 단순한 억압의 도구로 쓰는 대신 정원사 제이미와의 관계를 통해 알맹이가 상당히 굵은 로맨스로 발전시킵니다. 끝에 가면 극중 인물 대사를 통해 ‘이건 귀신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 이야기야’라는 변명을 해야 할 정도입니다. 물론 로맨스의 비중이 큰 건 결코 단점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드라마를 좋게 본 대부분 시청자들은 이 선택을 옹호하겠지요.

그래도 호러의 뿌리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드라마는 모든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다 다루고 있는데, 이중엔 귀신 커플 제슬 선생과 피터 퀸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할 미지의 존재에 대해 시청자들이 지나치게 많이 알게 된 것이죠.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드라마는 약간 위험한 해결책을 취했습니다. 최종 보스를 원작 소설 바깥에서 가져왔어요. 모든 진상이 밝혀지는 챕터 8의 제목은 [어느 낡은 옷에 대한 이야기]인데, 제목만 빌리고 재료만 몇 개 취한 다른 챕터와는 달리 제목을 가져온 단편을 비교적 충실하게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설의 유령이 이 드라마의 최종보스가 되었어요. 이게 완전히 성공한 모험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재미있지만 미완성인 성공이랄까. 한물간 유행어를 빌린다면 “언니가 왜 거기 있어?”의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드라마는 로맨스이기도 하니까요. 주인공의 어둠과 뒤틀림을 가져갈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도 같습니다.

호러물로서는 [힐하우스의 유령]이 더 좋습니다. 더 무서운 드라마여서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장르물로서 더 풍요롭고 창의적이죠. 하지만 [블라이 저택의 저주]도 게으른 호러는 아닙니다. 수많은 각색물을 갖고 있는 원작에게 완전히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자기만의 노래도 많습니다. 안경 귀신, 벽에 난 균열처럼 뻔뻔스럽게 잘 쓰인 호러 장치들도 있고요. 단지 몇몇 장치들은 지나치게 꼼꼼해서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특히 빙의와 연결되는 설정은 [사랑과 영혼]스러워서 이 이야기의 전체 분위기와 잘 안 맞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정말 골백번 각색된 원작으로 여전히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고 울림도 만만치 않은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 성취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10/29)

★★★

기타등등
원래는 피터 퀸트 역의 배우에게 정원사 제이미의 역할이 갈 뻔했다가, 전편에서 쌍둥이로 나온 배우들이 커플로 나오면 이상할 거 같아 바꾸었다는데, 전 좀 이해가 안 됩니다. 지금의 설정이 너무나도 당연하니까요.


크리에이터: Mike Flanagan, 배우: Victoria Pedretti, T'Nia Miller, Oliver Jackson-Cohen, Amelia Eve, Rahul Kohli, Tahirah Sharif, Amelie Bea Smith, Benjamin Evan Ainsworth, Kate Siegel, Carla Gugino, Henry Thomas

IMDb https://www.imdb.com/title/tt1097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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