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2013)

2013.08.11 23:19

DJUNA 조회 수:15077


김성수의 [감기]에서 악당으로 나오는 바이러스는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 H5N1. 물론 작가들이 재난영화에 맞게 개조한 돌연변이입니다. 조류 인플루엔자인데 왜 제목이 [감기]냐고요. 저에게 묻지 마시죠. 적어도 영어 제목은 [The Flu]입니다.

어떻게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한국으로 들어오느냐. 영화에서는 트레일러에 실려 분당으로 실려온 밀입국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있었다는 설정을 내놓습니다. 시체 속에서 한 명이 살아남아 분당구 안을 떠돌면서 바이러스를 뿌려대고, 그 바이러스를 들이킨 구민들은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는데, 그 속도가 요새 좀비 영화 증세를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여름용 액션물로서 [감기]는 지루한 영화가 아닙니다. 바이러스의 희생자들이 나타나고 발동이 걸리면 속도는 상당해요. 액션의 강도도 높고 호러 효과도 큽니다. 특히 분당이라는 공간의 활용은 뛰어나요. 이 영화의 공포도 단순히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막연한 사람들의 공포가 아니라 딱 분당 같은 곳에 살 법한 한국 중산층 사람들의 공포입니다.

단지 캐릭터로 가면 끔찍해집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들은 뭔가 심하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지요. 차와 함께 지하로 추락해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의사를 연기하는 수애 캐릭터가 정말로 이상하게 행동하니까요. 장혁이 연기하는 구조요원이 요 몇 초 동안 잽싸게 행동하지 않으면 의사선생은 차와 함께 저 밑으로 떨어져 죽습니다. 죽는다고요. 당연히 정상적인 사람이면 정신을 바짝차리고 구조요원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죠. 나중에 목숨을 구해주면 당연히 고마움을 표시해야 하고. 하지만 수애 캐릭터는 둘 다 안 합니다. 구조과정 중 다리가 드러난다고 난리를 치고 간신히 탈출하자 왜 자기 일을 한 걸 가지고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냐고 쏘아 붙이죠. 연속극 재벌 3세도 아니에요. 나이를 먹을만큼 먹은 사회생활하는 의사가 그럽니다.

박민하가 연기하는 수애의 딸이 나온 뒤에도 많이 갑갑합니다. 이 캐릭터는 척 봐도 그 나이 또래의 실제 아이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어요. 순전히 상상력 짧은 사람들이 '귀엽고 맹랑한' 아이로 상상해서 넣은 것인데 결과는 거의 언캐니 밸리에서 주워온 로봇 아이 수준입니다.

이 아이를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놓고 액션을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인데, 두 캐릭터가 시작부터 어긋나니 문제가 생기는 거죠. 엄마가 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건 사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는 동안 심각할 정도로 이기적이 되는 것도 이해가 되고요. 하지만 [감기]는 그 정도를 넘어섭니다. 이 영화에서 수애의 캐릭터가 저지르는 행동은 그냥 용서해주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액션 만들기는 쉽죠. 하지만 캐릭터에 대한 호감은 바닥을 칩니다.

이런 일이 영화 전체를 통해 벌어집니다. 악의보다는 둔감함과 안이함의 결과지요. 바이러스 숙주인 밀입국 노동자와 그를 통해 바이러스처럼 영화 속에 잠입할 수밖에 없는 외국인 혐오/인종차별을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의는 없어요. 하지만 다루는 방식이 형편없습니다. 결국 피하고 막으려던 부작용은 그대로 남고 영화는 불편해지죠. 한마디로 장혁으로 대표되는 한국인 남성 주인공(지루하고 맹탕입니다)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각본을 쓴 것 같은 영화를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작업 과정 중 어느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해요.

차라리 어느 정도 악의를 담으면 나아집니다. 적어도 자기네들이 무얼 하는 지는 아니까요. 민폐 캐릭터도 작정하고 민폐인 마동석이나 이희준 캐릭터가 더 낫다는 거죠. 적어도 우린 그들에게 진저리를 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악역인 건 당연한 일이고, 분당구민들의 집단행동을 그리는 과정에도 분명 작가들의 악의가 들어가는데, 여기서도 이들의 의도는 어느 정도 달성됩니다. 단지 그러다 보니 이 영화는 오로지 불편하거나 괴상하거나 혐오스러운 인물들만이 모여 벌이는 히스테리컬한 난장판이 됩니다. 영화가, 지금의 한국인들이 딱 그런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거라면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들이 정말로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지루한 영화가 아닙니다. 아니, 중반을 넘어서면 썩 괜찮은 액션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술적 성과도 괜찮고 배우들도 프로페셔널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밑에 언급한 불쾌한 사람들이 벌이는 난장판에서 "싹 쓸어버려!" 식의 사악한 쾌감을 느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잘못 계산된 캐릭터와 정치적 둔감함 때문에 칭찬보다는 이죽거림이 더 쉽게 나오는 영화입니다. 차라리 배우들이 직업적 이기심을 발휘해 자기 캐릭터를 수호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해봐요. 재수없다는 욕을 바가지로 들었겠지만 그래도 영화는 나아졌겠죠. (13/08/11)

★★☆

기타등등
[아웃 브레이크]에 나오는 한국인 묘사에 관객들이 분노했던 게 95년. 옛날이긴 하네요.


감독: 김성수, 배우: 수애, 장혁, 박민하, 유해진, 이희준, 차인표, 마동석, 다른 제목: The Flu

IMDb http://www.imdb.com/title/tt235131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2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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