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물 Burnt Offerings (1976)

2013.08.13 01:15

DJUNA 조회 수:10820


얼마 전에 카렌 블랙이 세상을 떴습니다. 특이한 사팔뜨기 얼굴 때문에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7,80년대 배우죠. 쟁쟁한 아메리칸 뉴웨이브 영화를 대표작으로 두고 있지만, 전 카렌 블랙을 장르 배우로 기억합니다. [화성에서 온 침입자] 리메이크, [트릴로지 오브 테러] 그리고 오늘 이야기할 [번제물]과 같은 영화 말이죠.

[번제물]은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채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 보고 충격 먹었다가 다음 날 학교에서 친구들과 떠들법한 그런 호러 영화죠. 저도 아마 그렇게 봤을 거예요. 단지 그게 더빙판이었는지 AFKN에서 자막도 없이 본 호러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더빙판이었다면 제목이 따로 있었을 텐데, 그 역시 기억이 가물가물.

귀신들린 집 이야기입니다. 로버트 마라스코라는 작가가 쓴 호러 소설이 원작이죠. 엄마, 아빠, 아들, 아빠의 이모인가 고모인가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가족이 여름 동안 머물기 위해 시골 저택을 빌립니다. 저택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호사스럽고, 집세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쌉니다. 단지 조건이 하나 있어요. 집주인인 남매의 어머니가 자기 방에 머물러 있을 테니 보살펴달라는 것이죠.

이들이 집에 들어오면서 점점 불길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들이 저택의 불길한 기운을 받아서인지 이상하게 변하는 거죠. 아빠는 수영장에서 아들과 놀아주다가 갑자기 아들을 익사하기 직전까지 물 속에 처박고, 엄마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집에 집착하기 시작하고요. 그리고 다락방에 숨어 있는 집주인의 엄마를 본 사람은 엄마밖에 없습니다.

[번제물]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리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 이미 호러팬들은 [더 헌팅], [헬하우스의 전설], [샤이닝]과 같은 영화들에서 비슷한 것들을 보았어요. 특히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추상적인 악령의 영향 밑에서 평범한 가족이 위험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샤이닝]과 닮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샤이닝]보다 먼저라는 점은 분명히 해두어야겠습니다. 당시 관객들이 받았던 충격은 [샤이닝] 이후의 관객들이 받았던 충격보다 컸을 거예요.

영화는 쉽게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몇 개 갖고 있습니다. 아빠가 환영에서 보는 운전기사 악마라든가, 저택의 수상쩍은 역사를 보여주는 음산한 단서들 그리고 결말요. 아마 [번제물]이라는 영화를 다 잊어버린 관객들도 그 결말만은 기억할 거예요. 사실 그렇게 뜻밖은 아닙니다. 굉장히 유명한 모 호러영화의 영향도 있고요. 하지만 이미 예측하고 보더라도 여전히 효과가 상당합니다. 아마 예측하고 봤기 때문에 더 강한 것인지도 몰라요.

배우들은 쟁쟁합니다. 카렌 블랙, 올리버 리드, 베티 데이비스. 잠시 나오는 조연도 아일린 헤카트와 버지스 메레디스지요. 이들은 모두 좋은 호러 연기 기회를 잡고 있어요. 소문에 따르면 베티 데이비스와 카렌 블랙은 촬영장에서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 부정적인 기운이 영화에 나쁜 영향을 끼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블랙의 독특한 외모와 분위기가 없었다면 영화의 결말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겠죠.

[번제물]은 클래식이라기보다는 귀신들린 집 장르에 관심이 있는 호러 팬이나 출연 배우들의 팬이 호기심과 향수에 끌려 잠시 지나치는 골동품에 가까운 영화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 관객들이 이 영화의 잘 다듬어진 사악함을 잊어버린다면 많이 아쉬울 거예요. (13/08/13)

★★☆

기타등등
다시 한 번 카렌 블랙의 명복을 빕니다.


감독: Dan Curtis, 배우: Karen Black, Oliver Reed, Burgess Meredith, Eileen Heckart, Lee Montgomery, Dub Taylor, Bette Davis, 다른 제목: 마리안의 욕망

IMDb http://www.imdb.com/title/tt0074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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