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중독 (2014)

2014.05.25 15:53

DJUNA 조회 수:16284


김대우가 신작 [인간중독]의 배경으로 삼은 건 1969년 군 관사입니다. 주인공은 귀국 후 베트남 전의 무공과 장군인 장인의 지원 덕택에 승진을 거듭하고 있지만 여전히 전쟁 후유증을 앓고 있는 교육대장 김진평 대령이라는 사람이고요. 영화가 시작되면 그의 밑으로 경우진이라는 장교가 들어오는데, 김진평은 그의 아내 종가흔과 격렬한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인터뷰를 들어보니 군관사라는 배경이 영화에 사용된 건 실제로 잠시 관사에 산 적 있던 김대우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더군요. 여전히 매력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이 곳에 대한 향수 섞인 묘사는 이해가 됩니다. 1969년이라는 시대 배경은 베트남전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에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화양연화]와 같은 20세기 중반 배경 중국 영화의 영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종가흔은 화교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지요. 일종의 영화적 페티시인 겁니다.

[인간중독]은 영화를 보기도 전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것 같은 영화입니다. 극단적인 속물 배우자를 둔 상처입은 주인공들이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파멸합니다. 고전적인 불륜 멜로의 기본 설정이지요. 남자가 상처받은 전쟁 영웅이고 여자의 남편이 얄팍한 출세지상주의자이니, 진짜 전쟁터에서 고생한 군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동안 어떤 인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보여주며 대한민국 군문화에 대한 야유를 보내는 것이겠죠. 하여간 그림이 보입니다. 의도도 보이고요. 기대치도 정해집니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보면 마땅히 도달해야 할 기대치까지 이야기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캐릭터 설정이 완성된 뒤로 영화는 계속 수평비행이에요. 오히려 계속 밑으로 떨어지죠.

여기서 주연배우 송승헌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김진평은 고전소설의 주인공 같은 인물이에요. 영화관을 찾은 사람들은 익숙한 고전 음악을 들으러 온 관객과 같은 태도로 그를 연기하는 배우를 지켜보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배우는 간신히 악보만 따라가는 것도 힘들어 하고 있지요. '절제된' 연기를 할 때는 속이 텅 비어 보이고, '격정 멜로' 연기를 할 때는 마음이 아닌 몸 어딘가가 아픈 거 같아 보이고요. 아무리 배우에 대한 선입견을 접고 보려고 해도 송승헌의 캐스팅은 실패한 실험입니다.

김진평을 더 멋들어지게 연기할 수 있었던 배우는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캐스팅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송승헌의 문제가 심각하긴 하지만 그만의 문제가 아닌 거죠. 김대우 역시 '익숙한 고전 음악의 연주'라는 은유에서 걸려넘어집니다. 그의 캐릭터 활용은 설정을 주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암만 기다려도 캐릭터는 제자리이고 행동을 안 해요. 차라리 작정하고 다윗과 밧세바 이야기로 갔다면 이야기가 나왔겠지만 갑갑하기 짝이 없는 김진평은 그것도 제대로 하지 못 하죠. 그렇다고 그 빈 자리를 내적 고민이 채워주는 것도 아니고요. 김진평도 그렇지만 종가흔도 마찬가지. 시작하기 전에 깔아놓은 설정이 얼마나 많은가요. 화교 출신에, 기구한 어린 시절에, 배배 꼬인 가족 환경에.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간신히 존재하며 기계적인 기능만 수행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거든요. 이 설정을 떼어내도 캐릭터에 별다른 변화가 없을 정도로. 그 때문에 이 둘이 연애하는 걸 구경하는 건 좀 따분합니다.

주인공들에게 결여된 생기를 그나마 채워주는 건 주변의 조연들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주인공들의 연애 이야기가 아니라 남편의 계급에 따라 위치가 정해지는 관사내 장교 부인들의 커뮤니티 묘사죠. 김진평의 아내인 이숙진을 연기한 조여정이 가장 빛나지만 전혜진이 연기하는 최중령의 아내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들은 평면적이지만 캐릭터가 분명하고 주인공들보다 여러 모로 쉽게 납득이 가며 시선도 더 끕니다. 이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종가흔의 가족 묘사도 재미있는 구석이 있습니다. 특히 예수정이 연기하는 시어머니와의 관계는요. 딸처럼 키워 온 여자아이에 대한 애정과 그래도 남아 있는 시어머니의 위치가 오묘하게 공존하는 시어머니의 태도를 보면 이들의 이야기가 중심 연애담보다 더 궁금합니다

[인간중독]은 실패한 리메이크처럼 보이는 영화입니다. 오로지 69년 당시 한국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그리고 있는 영화인데도 어딘가 더 나은 외국 영화 원본이 있을 거 같다는 착각이 드는 그런 영화죠. 아무래도 김대우는 그가 다루는 세계를 충분히 날카롭게 다룰 위치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김진평에 대해서는 더 냉정했어야 했어요. 비판 대상이 아무리 뚜렷하게 보인다고 해도 주인공을 그렇게 쉽게 그리면 곤란하죠. 그렇게 쉽게 비판 대상에서 분리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14/05/25)

★★☆

기타등등
전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오히려 이숙진에 마구 감정이입을 하게 되더군요. 김진평은 상처입은 주인공 흉내를 내기엔 좀 위선자가 아닙니까? 그렇게 고고한 척 할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장군 딸과 결혼은 왜 하나요. 그런 남편을 위해 노력하는 아내가 아깝지.

종가흔 역의 임지연에 대해서는 별 불만이 없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아직 문제가 많아요. 하지만 신인배우의 아슬아슬하게 떨리는 연기를 보는 게 연기 경력이 거의 20년인 배우의 밋밋함을 보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습니다. 그런 떨림이 캐릭터와 어울리기도 하고.

2년 뒤의 에필로그는 사족입니다. 이미 차갑고 완벽하게 결말을 내놓고 그 뒤에 장황한 이야기를 덧붙이니 더 구차해졌지요. 이 역시 김대우가 김진평에게 충분히 객관적이지 못 했다는 증거죠. 감독이나 작가가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의 공허함을 보지 못 하고 필요이상으로 관대해지면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감독: 김대우, 출연: 송승헌, 임지연, 조여정, 온주완, 박혁권, 전혜진, 배성우, 엄태구, 예수정, 김혜나, 유해진, 정원중, 이승준, 다른 제목: Obsessed

IMDb http://www.imdb.com/title/tt330373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3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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