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라 Viola (2012)

2013.08.12 00:32

DJUNA 조회 수:6560


주말에 이틀 연속으로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영화들을 네 편 봤습니다. 마지막 영화인 [비올라]는 몇달 전 전주에서 봤으니, 정확히 말하면 세 편이죠. 2006년에 만들었다는 다큐멘터리를 제외하면 전 작품을 다 본 셈입니다.

피녜이로의 영화에 대해 뭐라고 말할 입장이 못 됩니다. 우선 그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고, 솔직히 그의 영화들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도 말을 못해요. [비올라]를 제외한 그의 다른 영화들을 온전하게 즐겼다고 할 수도 없고. [비올라]도 전주에서 처음 봤을 때는 '이게 뭔가'했어요. 당시 경험을 예습삼아 다시 보니 재미가 두 배 정도 상승하더군요.

이유가 있습니다. 피녜이로가 그렇게 어려운 영화를 만들기 때문은 아니에요. 하지만 아르헨티나인이 아닌 관객들에게 그의 영화는 따라가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일단 말이 엄청나게 많아요. 자막 따라가다보면 중간에 숨이 찰 정도. 게다가 그는 자크 리베트가 그랬던 것처럼 문학적 교양이 풍부한 영화를 만드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아르헨티나인들만 친숙한 대상에게 할애됩니다. 이 중 피녜이로가 괴상할 정도로 집착하는 인물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었고 작가였던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인데, 아마 여러분들 중 상당수는 그의 이름을 여기서 처음 들어보셨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캐릭터들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에서는 여덟 명의 젊은이들이 주인공들인데, 이들의 관계는 속사포와 같은 대사들을 통해서만 설명되고 정작 화면 위에서는 구분하기 어려워요. 전 이게 단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재감상 이후에는 의견이 또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여간 [비올라]는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피녜이로는 19세기 아르헨티나 역사나 사르미엔토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아요. 대신 그가 매료된 또다른 대상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집중합니다. 제목의 [비올라]는 [십이야]의 주인공인 바이올라죠. 2010년 [디지털 삼인삼색]에 수록된 그의 중편인 [로잘린다]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연하는 또는 공연하려는 배우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에는 셰익스피어의 몇몇 작품들을 편집해서 공연하는 여성극단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대에서 [십이야]의 올리비아를 연기하는 사브리나는 최근에 남자친구와 헤어졌습니다. 사랑과 연애에 대한 짧은 토론이 이어진 뒤, 바이올라를 연기하는 동료배우인 세실리아는 올리비아를 유혹하는데, 여기서부터 앞부분에 무대를 잠시 볼 수 있었던, 오르시노의 메시지를 가져온 바이올라가 올리비아를 처음 만나는 장면의 리허설이 시작됩니다. 셰익스피어의 텍스트가 일상의 배경 소음에 섞여 평범한 아파트에서 반복되는데, 그냥 반복되는 게 아니라 '버드나무 오두막' 노래를 반환점을 해서 점점 짧아져 가요. 이러다보니 연극 내용과 관련있다고도 할 수 있고 또 그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매혹적인 영화의 리듬이 만들어집니다.

리허설 장면이 클라이맥스를 찍으면, 영화는 타이틀 롤을 소개합니다. 주인공 비올라는 남자친구와 함께 메트로폴리스라는 작은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남자친구가 인터넷에서 불법 파일들을 다운 받아 DVD나 CD를 구우면 비올라는 자전거로 고객에게 상품을 배달하죠. 이게 아르헨티나에서는 이익이 나는 사업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피녜이로의 세계에서는 그런 모양입니다.

물건을 배달하러 시내를 돌아다니던 비올라가 극단원들을 만나면서 둘의 세계는 한 점에서 만납니다. 고객인 사브리나의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비올라는 세실리아의 차 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안에서 자신의 애정생활에 대해 토론하고 극단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습니다. 비는 그치고 물건은 배달되고 비올라는 아파트로 돌아가고... 영화는 끝나버립니다.

이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피녜이로가 만든 이 자그마한 세계는 그런 걸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아요. 개별 요소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로잘린다]의 의미심장한 결말이 그랬던 것처럼, 완벽하게 연결되지 않아도 무언가 더 깊은 연결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영화는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 자체가 목표일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셰익스피어가 잠시 손아귀 안에 잡아놓은 이야기와 주제가 실제 삶 속에 들어가면서 모양을 잃고 확산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전주에서 보았을 때보다 어제 봤을 때가 더 재미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전 앞에서 피네이로의 전작들을 보는 데에 애를 좀 먹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을 통하고 나니 [비올라]는 훨씬 재미있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그가 끊임없이 반복하는 스타일, 주제, 소재 그리고 무엇보다 계속 출연하는 배우들(특히 비올라 역의 마리아 빌라르는 그의 네 영화에 모두 나옵니다)이 처음 감상 때에는 무심하게 넘겼던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넣어주더란 말이죠. 홍상수가 그렇듯, 마티아스 피녜이로는 느슨하게 반복되는 필모그래피 전체 안에서 보아야 제대로 된 모양이 잡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13/08/12)

★★★☆

기타등등
지금 피녜이로는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중이랍니다. 정치가로서의 사르미엔토가 아니라 셰익스피어, 그것도 로맨틱 코미디의 번역가 겸 번안가로서의 모습을 그린다나요.


감독: Matías Piñeiro, 배우: María Villar, Agustina Muñoz, Elisa Carricajo, Romina Paula, Gabriela Saidon, Laura Paredes, Esteban Bigliardi, Julián Tello

IMDb http://www.imdb.com/title/tt2379418/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077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