뤽 베송의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는 피에르 크레스탱과 장 클로드 메지에르의 코믹스를 영화화한 것이죠. 원작이 되는 [발레리안과 로렐린] 시리즈는 1967년부터 2010년까지 22권이 나왔는데, 영화는 그 중 [천 개 행성의 도시]에서 제목을 빌리고 [그림자들의 대사]에서 스토리와 설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얼마 전에 번역된 코믹스를 예습했는데, 좀 구식이긴 해도 다들 좋았습니다. 장르를 잘 아는 전문가들이 적당한 유머와 사회 비판을 담아 쓴 멋진 텍스트에 끝내 주는 비주얼을 더한 작품이죠. 20세기 청소년들에겐 압도적인 경험이었을 것이고 지금 보기에도 좋습니다. 의외로 평등한 두 주인공 발레리안과 로렐린의 관계도 심하게 낡지는 않아서 옛날 성차별적 묘사의 눈쌀 찌푸려지는 느낌도 별로 없습니다.

근데 베송의 영화는 그만한 재미가 없습니다. 옛날 SF의 한계가 아니라 그냥 베송의 한계예요. 원작 코믹스는 고전의 무게가 있는데, 영화가 그걸 살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알파 스테이션이란 곳입니다. 지구 궤도의 우주정거장이 새로운 문명을 맞아 점점 커지면서 형성된 거대한 세계인데 결국 지구를 떠나 먼 우주로 갔죠. [그림자들의 대사]에 나오는 센트럴 포인트가 모델인데, 벌써 여기서부터 설정이 약해졌습니다. 센트럴 포인트의 설정은 그렇게 지구중심적이 아니거든요. 그냥 우주의 번잡한 교차로에 어쩌다가 만들어진 문명의 집합소죠. 영화는 알파 스테이션이 지구로부터 자그마치 11억 킬로미터 밖에 있다고 허풍을 떨지만 그 허풍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익숙한 스케일을 고려해보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1광년이 9조 4천6백만 킬로미터잖아요.

원작에서 발레리안과 로렐린은 시공간 요원인데, 이 영화에서는 군인 같습니다. 계급이 있어요. 발레리안은 소령이고 로렐린은 하사. 어쩔 수 없이 한국어 자막에선 로렐린이 존대를 해야 합니다. 원작에서 로렐린은 11세기 프랑스에서 왔는데, 이 영화엔 그 설정이 날아갔습니다. 저야 영화 보기 며칠 전에 원작의 일부를 접했을 뿐이지만 벌써부터 실망하기 시작합니다. 발레리안과 로렐린을 발레리안과 로렐린으로 만드는 캐릭터의 디테일이 계속 날아가고 있어요. 로렐린의 시니컬한 태도 같은 것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요. 그렇다고 새로운 매력이 첨가된 건 아니니, 원작의 팬들은 친숙한 캐릭터가 날아가 실망할 것이고 원작을 모르는 관객들은 그냥 데인 드한과 카라 델레빈이 특별할 것 없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액션하는 영화로 보겠죠.

[발레리안과 로렐린]의 장점은 조금 낡아보이고 도식적이어도 장르적으로 상당히 단단하다는 것인데, 이 영화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설정과 이야기가 아주 겉핥기예요.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진주족은 디자인에서부터 배경에 이르기까지 카메론의 [아바타]를 흉내낸 티가 너무 납니다. 이들과 관련된 이야기도 지나치게 설교투이고 나이브해서 원작의 재미가 많이 떨어졌어요.

남은 건 비주얼인데, 괜찮습니다. 하지만 전 여전히 장 클로드 메지에르가 그린 코믹스의 세계가 더 존재감이 강렬하고 무게감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묘사 정도로 관객들이 압도되는 시대도 지났고요. (17/08/23)

★★

기타등등
데인 드한과 카라 델레빈은 호흡이 괜찮은데, 너무 닮아서 그냥 남매처럼 보입니다. 어차피 로렐린의 설정도 날아가버렸으니 그냥 남매로 해도 되었을 걸 그랬어요.


감독: Luc Besson, 배우: Dane DeHaan, Cara Delevingne, Clive Owen, Rihanna, Ethan Hawke, Herbie Hancock, Kris Wu, Sam Spruell, Alain Chabat, Rutger Hauer, 다른 제목:

IMDb http://www.imdb.com/title/tt2239822/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7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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