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통정리가 필요하군요. 2010년에 프랑스의 만화가 쥘리 마로가 [Le bleu est une couleur chaude]라는 그래픽 노블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압델라티프 케시시가 [La vie d'Adèle - Chapitres 1 et 2]라는 제목으로 각색해서 칸 영화제에 출품했습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번역해서 [Blue Is the Warmest Color]가 되었고요. 한 편 원래는 [Blue Angel]이라는 제목을 달고 영어로 번역될 예정이었던 원작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영화 번역제를 따라 [Blue Is the Warmest Color]로 출판되었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칸 영화제 이후 원작이 [파란색은 따뜻하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케시시의 영화는 영화 원제를 그대로 번역한 [아델의 이야기 1부와 2부]라는 제목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되었다가 [가장 따뜻한 색, 블루]라는 제목으로 개봉됩니다. 전 씨네큐브 프리미어 페스티벌에서 여전히 [아델의 이야기 1부와 2부]라는 제목을 달고 상영된 버전을 보았고요. 제목에 대한 제 의견을 말하라면, 마로의 원작 제목을 그대로 취한 [가장 따뜻한 색, 블루]도 좋은 제목이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왜 케시시가 이 영화의 제목을 [La vie d'Adèle - Chapitres 1 et 2]라고 지었는지 알게 된다고 말하겠습니다.

쥘리 마로의 원작은 어떻게 보면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멜로드라마입니다. 주인공 클레망틴이 죽은 뒤에 여자친구 엠마에게 남긴 일기장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알게 된 고등학생이 프랑스에서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일들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친구들, 가족, 사회의 호모포비아와 하나씩 맞서 싸워야 하고 이를 일단 극복하고 나면 관계맺기의 험난함이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지요. 이야기는 비극적이지만 거의 완벽한 사랑의 완성으로 끝이 납니다. 익숙하고 통속적이지만 굉장히 로맨틱한 이야기예요.

케시시의 영화는 처음엔 마로의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기장이라는 액자는 없어졌지만 원작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이 영화 속에서도 일어나지요. 예술학교에 다니는 파란 머리 미술학도인 엠마와 사랑에 빠지고 그 때문에 학교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하지만 영화의 중반 이후 이야기가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이제 주연 배우 이름을 따 아델이라고 불리는 주인공은 원작의 클레망틴이 겪는 가족과의 갈등을 거의 겪지 않아요. 대신 케시시는 원작에서 비교적 짧은 후반부를 영화의 2부로 삼아서 길게 늘입니다. 길어졌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완전히 바뀌었지요. 원작은 모든 것이 정리되는 완벽한 결말로 끝이 나지만 영화는 주인공을 미완성의 황량한 인생의 중반에 던져버립니다. 원작자 쥘리 마로는 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건 섹스신보다는 결말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적어도 제가 원작자였다면 그랬을 것 같습니다. 예술적 성취를 떠나, 원작자에겐 자기 새끼들이나 다름없을 텐데.

원작과 영화를 갈라놓는 가장 큰 차이는 주인공을 다루는 태도입니다. 원작에서 클레망틴은 이야기의 주체예요. 주인공인 동시에 화자죠. 적어도 액자 안에서 원작의 이야기는 클레망틴을 통해 정리되고 분석되고 이야기됩니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 아델에게는 이런 통제권이 없습니다. 카메라는 거의 스토커처럼 아델을 따라다니고 아델은 자신을 감추거나 보호할 방패가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영화는 다른 영화들이라면 시간을 줄이거나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를 제공해주기 위해 잘라낼만한 장면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 때문에 관객들은 실시간으로 몇 년간에 걸친 아델의 인생을 그대로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여기서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의 존재감은 엄청납니다. 포스터에서 우리 눈을 먼저 사로잡는 사람은 상대역인 레아 세두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에그자르크풀로스죠. 이 영화에서 에스자르크풀로스는 도대체 연기를 하는 것 같지 않아요. 먹는 것, 자는 것, 우는 것, 섹스하는 것 모두가 지독하게 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굉장히 육체적이라는 느낌을 줘요. 그 때문에 주인공 아델이 이 영화를 통해가며 겪는 모든 체험이 그대로 육체적인 감각으로 전환되어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는 느낌을 주는 겁니다.

레아 세두는 원작보다 훨씬 냉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원작만 읽은 사람들에겐 이 영화에서 레아 세두는 오직 영화 절반만 파란 머리로 나온다고 하면 될 것 같아요. 원작이 아주 짧게만 묘사하고 끝난 금발 시절의 부정적인 느낌이 더 커졌어요. 특히 2부의 초반은 예술가 애인을 가지는 것의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보면 됩니다. 여자건 남자건, 이성애자건 동성애자건, 이건 달라질 수가 없나봐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미완성으로 끝나는 영화입니다. 아델의 이야기는 영화가 끝난 시점에서부터 어디로건 갈 수 있습니다. 원작과는 달리 영화의 결말이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볼 수도 없고요. 그냥 어떤 여성의 일생에서 한 덩어리를 별 계산 없이 칼로 썩 잘라내 피를 흘리며 꿈틀거리는 채로 관객들 눈앞에 들이미는 것입니다. 과연 제가 그 뒤의 이야기를 알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영화관에서 아델과 함께 한 3시간만큼 격렬한 영화 체험은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것이죠. (13/12/11)

★★★☆

기타등등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블러처리하지 않은 무삭제 버전으로 개봉되는 모양입니다.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그게 그렇게 신기하지는 않아요. 유명한 섹스신 내내 두 배우의 몸이 복잡하게 얽힌 채 붙어있어서 잘라내기도, 블러처리도 어색해보이거든요.


감독: Abdellatif Kechiche, 배우: Adèle Exarchopoulos, Léa Seydoux, Salim Kechiouche, Aurélien Recoing, Catherine Salée, Benjamin Siksou, Mona Walravens, Alma Jodorowsky, 다른 제목: Blue Is the Warmest Color

IMDb http://www.imdb.com/title/tt2278871/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8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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