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 Elle (2016)

2017.06.17 23:07

DJUNA 조회 수:10256


파울 페르후번의 [엘르]는 성폭행으로 시작하는 영화입니다. 캐릭터나 배경 소개도 없어요. 주인공인 게임 회사 CEO 미셸이 복면 쓴 괴한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이 오프닝이에요. 심지어 시작도 보여주지 않죠.

성폭력은 심각한 범죄이고 당연히 관객들은 이 사건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셸의 반응은 좀 달라요. 새 자물쇠를 달고 무기를 구입하고 홀로 범인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시도하는 것 같긴 한데, 경찰에 알리지도 않고 그렇게 심하게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습니다.

경찰을 부르지 않는 이유는 중반에 밝혀집니다. 미셸의 아버지가 가석방 심사를 앞두고 있는 악명 높은 살인자였던 거죠. 정확한 사연은 모르겠지만 미셸도 그 사건과 연결되어 있었고요. 당연히 경찰이 껄끄럽겠죠.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미셸에겐 관객들이 완전히 읽지 못한 무언가가 있어요.

강간범을 찾아 복수하는 과정의 이야기일 거라는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고 영화의 이야기는 사방팔방 흩어집니다. 이제 강간사건은 미셸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 수많은 재료 중 하나에 불과해요. 몇십 년 어린 남자와 연애 중인 미셸의 어머니, 감옥에 있는 미셸의 아버지, 아무래도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임신한 것 같은 미셸의 아들 이야기는 강간 이야기만큼이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적어도 강간범의 정체가 밝혀지는 중후반까지는요.

강간사건 이야기로 간다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집니다. 당연히 '논쟁적'이 되고요. 처음엔 미셸은 강간범의 정체를 밝히고 복수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로는 그 강간범을 자신의 극단적인 욕망을 위해 통제하거나 이용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연히 감정이입하기가 무척 힘든 캐릭터예요. 이 이야기나 주제에 동의하기도 어렵고. 하지만 미셸이라는 캐릭터의 존재를 부정할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캐릭터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가 그래요. 재미있고 신경 쓰이고 기억에 오래 남지만 굳이 동의할 생각은 안 들죠.

주연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이전 영화인 [피아니스트]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두 영화 모두 어두운 욕망을 감추고 있는 여자 이야기였죠. 하지만 [피아니스트]를 보면 우린 불쾌해하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주인공을 온전한 한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엘르]에선 그게 어렵습니다. 미셸의 삶을 이루는 수많은 조각들이 선정적으로 전시되고 있지만 그것들을 완벽하게 짜맞추기는 불가능하고 주인공의 내면에 깊이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되어진다면 그건 이야기보다는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와 존재감 덕택이죠.

선정적이고 뻔뻔스럽고 말도 안 되는 주제로 관객들을 자극하고. 딱 파울 페르후번의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프랑스적인 이야기이기도 해요. 정작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런 주인공이 나오는 20세기 프랑스 소설이 꽤 많을 것 같지 않나요? 정보를 조금 더 드린다면 이 영화의 원작은 [베티 블루]의 원작자인 피에르 장이 쓴 [Oh...]라는 제목의 소설입니다. 페르후번이 여기에 무엇을 더했는지는 원작을 읽기 전까진 알 수 없겠죠. 그냥 영화의 스타일로 짐작할 뿐이지. (17/06/17)

★★★☆

기타등등
자막에선 프랑스 이름 대부분을 영어식으로 표기하더군요. 중역인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심했죠. Georges의 경우는 철자도 다른데.


감독: Paul Verhoeven, 배우: Isabelle Huppert, Laurent Lafitte, Anne Consigny, Charles Berling, Virginie Efira, Judith Magre, Christian Berkel, Jonas Bloquet, Alice Isaaz, Vimala Pons

IMDb http://www.imdb.com/title/tt371653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7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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