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 마키나 Ex Machina (2015)

2015.01.18 15:40

DJUNA 조회 수:18261


케일럽은 블루북이라는 웹서치엔진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입니다. 어느 날 그는 회사의 CEO인 네이든과 일주일을 보낼 수 있는 사내행사에 당첨이 돼요. 헬기로만 갈 수 있는 머나먼 북쪽 숲에 있는 그의 저택에 도착한 케일럽은 엄청난 사실을 하나 알게 됩니다. 네이든은 에이바라는 로봇을 만들어 놓고 있었고, 케일럽은 이 로봇의 튜링 테스트를 위해 불려온 것이었죠.

알렉스 갈란드의 [엑스 마키나]의 도입부는 징그러울 정도로 전통적입니다. 예고편만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는 분들을 위해 이 영화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다시 한 번 정리해볼까요? 미치광이 천재 과학자, 그가 만든 아리따운 여자 로봇, 그들이 사는 저택을 방문한 천진난만한 남자주인공. 이 정도면 거의 19세기적인 [프랑켄슈타인] / [피그말리온]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수억번은 되풀이되었을 인기 소재죠.

단지 갈란드는 이 익숙한 이야기의 현대 버전을 만들기 위해 숙제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장르 공식이니 다들 이해해 줄 거야"라는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이런 이야기가 말이 되도록 최선을 다한 것이죠. 이런 종류의 설정을 보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질문들 있지 않습니까. "왜 인공지능을 섹시한 여자 모양 로봇에 심어야 하는 거야? 왜 그 로봇은 남자를 유혹하는 이성애자 여자처럼 행동해?" 진짜 정답은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섹시한 여자 로봇을 좋아했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영화는 여기에 그럴싸한 논리를 부여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런 논리가 영화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남성중심 과학자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연구하고 있죠. 그렇다고 영화가 섹시한 여자 로봇이 주는 감각적 쾌락을 부정한다는 건 아니지만.

영화는 거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 그 대화는 이 주제와 관련된 거의 모든 아이디어의 실험입니다. 인공지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것에겐 자아가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인공지능에 대한 새로운 윤리 기준을 세워야 하는가, 강한 인공지능은 특이점의 시작인가, 이것이 인류 종말로 연결된다면 우리는 연구를 중단해야 하는가. 누군가 지적했듯, 영화는 종종 SF의 탈을 쓴 TED 강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장르 공식도 마찬가지로 꼼꼼하게 체크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반전 가능성은 모두 계산에 넣고 있어서 "난 이 결말을 맞혔어!"의 쾌감은 없습니다. 뜻밖의 반전보다는 논리적으로 최선인 결말을 추구하는 영화죠. 캐릭터 역시 고전적인 틀로 시작하면서 그 틀이 캐릭터 발전이나 이야기 전개를 막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고요. 그 때문에 익숙한 길을 가고 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갑갑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도입부와 결말 부분을 제외하면 네이든의 저택을 떠나지 않는 배우 중심 영화입니다.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들만큼이나 실내극인 거죠. 다행히도 캐스팅이 좋습니다. 도널 글리슨, 오스카 아이작, 알리시아 비칸더 모두 이 로봇 이야기를 베리만의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진지하고 정확하게 연기하고 있죠.

장르의 신기원을 열며 "이런 게 가능했구나!"를 외치게 하는 영화도 있고 기존 재료를 충실하게 사용하며 "이 공식으로 여기까지 오는 것도 가능했네?"라고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있는데, [엑스 마키나]는 후자입니다. 이런 영화들이 더 많아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장르는 굳어지기 쉬운 습관이라 이렇게 성실하게 자기가 가진 것을 재검토하는 영화들이 필요해요. (15/01/18)

★★★☆

기타등등
알리시아 비칸더와 도널 글리슨은 전생에 키티와 레빈이었지요.


감독: Alex Garland, 배우: Domhnall Gleeson, Alicia Vikander, Oscar Isaac, Sonoya Mizuno

IMDb http://www.imdb.com/title/tt0470752/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18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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