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베리안 스튜디오]. 정확히 말하면 '버베리안 사운드 스튜디오'입니다. 왜 한국 제목에서 '사운드'가 빠졌는지 모르겠군요. 제목을 구성하는 세 단어 중 가장 중요한데.

시대는 1976년. 이탈리아 호러 장르가 정점을 향해 달려가던 때이죠. [서스피리아]가 1977년 작품이니 대충 계산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하여간 우리의 주인공인 사운드 엔지니어 길데로이는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스타 감독인 산티니의 신작 [The Equestrian Vortex]의 음향 믹싱 작업을 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내려옵니다. 하지만 그는 호러영화를 싫어하고 이탈리아어를 거의 못하며 주변의 이탈리아인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합니다. 스튜디오의 환경은 개판이고, 정작 감독은 녹음 작업보다 배우나 성우들과 노닥거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지요. 반복되는 지루한 작업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동안 길데로이의 현실은 천천히 파괴되어 갑니다.

피터 스트릭랜드의 [버베리안 스튜디오]는 이탈리아 호러 영화의 팬들에게는 깜짝 선물과도 같은 영화입니다. 팬들이라면 당시 이 사람들의 후시 녹음 작업이 궁금했을 거예요. 당시 이탈리아 영화계는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촬영과 녹음 작업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으니까요. 이 영화에서처럼 배우와 성우가 다른 사람인 경우도 흔했고요. 다시 말해 완전히 독립적인 음향의 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에는 제가 가장 궁금해했던 부분이 빠져 있어요. 영어 더빙요. 하긴 모든 걸 다 다룰 수는 없는 거겠죠.

관객들은 음향 믹싱 작업 중 [The Equestrian Vortex]를 거의 볼 수 없습니다. 보여지는 것은 도입부 부근에 나오는 오프닝 크레딧이 전부이죠.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관객들의 상상에 맡겨지고, 그 과정 중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성우들의 얼굴과 음향 효과를 위해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야채들입니다. 하지만 굳이 봐야 할 이유도 없겠죠. 이미 우린 그 영화가 뭔지 알고 있는 걸요. [The Equestrian Vortex]는 발레학교를 승마학교로 옮긴 [서스피리아]입니다. 나머지 짜투리들도 역시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이탈리아 호러 영화의 클리셰들이고요. 영화 전체가 팬들을 위한 잔인무도한 농담인 거죠.

생각과는 달리 장르 호러는 아닙니다. 호러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뿐이죠. 하긴  길데로이가 느끼는 현실 자체가 호러일 수는 있겠습니다. 호러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일 때문에 억지로 호러 영화를 봐야 하는 상황은 공포 그 자체죠.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 악당들은 잔인함에서 세계의 첨단을 달리고 있었으니까요. 물론 작업 환경도 지독합니다. 특히 여자 성우들은 지속적인 성추행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어요. 그리고 영화는 이탈리아 호러 영화의 여성 폭력과 이러한 제작 환경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 반대할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스토리를 따라가기 위해 볼 영화는 아닙니다. 전반부는 보는 데에 인내심이 어느 정도 필요한 갑갑한 일상의 반복이고, 후반부에서는 이야기 자체가 파괴되어 버려요. 물론 관객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후자지만 이 둘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자와 같은 환경처럼 사람들의 현실감각을 떨어뜨리는 것도 없으니까요.

후반의 현실 파괴는 철저하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길데로이의 현실은 대피 덕을 가지고 노는 벅스 버니처럼 심술궂은 편집자에 의해 조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편집에 의해 시간순이 파괴되는 건 당연한 일이고 필름이 중간에 불타버리고 다른 필름으로 대체되거나 영어밖에 모르는 사람이 이탈리아어 더빙으로 이야기를 하는 장면들이 연달아 이어지지요. 여기서부터 영화는 아르젠토보다 데이빗 린치에 더 가까워집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잠시 작업하고 떠나려 했던 고약한 외국 영화 속에 영원히 갇혀 버리죠. 단순히 몸과 마음이 감금되는 것을 떠나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매커니즘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버베리안 스튜디오]는 이탈리아 호러영화 팬들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정작 이 장르 자체를 악당으로 돌리는 비장르 영화입니다. 이 정도면 일부러 작정하고 관객들을 따돌린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일부 골수팬들이라면 그렇기 때문에 더 재미있어할 수도 있겠죠. 대부분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그냥 난장판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고요. (12/10/13)

★★★

기타등등
영화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 자막이 붙어 있어요. 심지어 영국인 주인공이 영어로 말을 할 때도요. 영국에서 상영될 때도 이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이렇게 상영되었어도 이해가 되긴 해요.

감독: Peter Strickland, 출연: Toby Jones, Tonia Sotiropoulou, Susanna Cappellaro, Cosimo Fusco, Eugenia Caruso, Hilda Péter, Layla Amir, Chiara D'Anna, Antonio Mancino

IMDb http://www.imdb.com/title/tt1833844/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96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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