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르 카레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렛 미 인]의 토마스 알프레드손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나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했었죠. 알렉 기네스가 조지 스마일리로 나온 '결정판' 미니 시리즈가 있긴 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냉전시대의 스파이 소설도 지금 각색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겁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2차세계대전도 이미 지나간 사건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2차세계대전 영화를 만들잖아요? 냉전시대도 마찬가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죠.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시대배경은 1973년. 거의 40년 전입니다. 그냥 옛날이죠. 시대극의 소재인 겁니다.

브리짓 오코너와 피터 스트로간이 각색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영화 제목에는 쉼표가 없습니다)]의 각본은 척 봐도 고생을 엄청나게 한 티가 납니다. 결코 각색하기 쉬운 소설이 아니죠. 길기도 하지만 길이 때문은 아닙니다. 이보다 긴 소설들도 무리없이 영화로 만들어지니까요. 문제는 형식입니다. 르 카레의 소설은 물리적 액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심지어 수사과정 대한 이야기도 아니죠. 조셉 콘래드의 소설들이 그렇듯,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도 수많은 화자들을 개입시키며 다양한 시점의 과거를 쌓아가는 구조를 택하고 있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주인공들은 그냥 앉아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만 있어요.

영화는 소설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MI6 안에 소련측이 심어놓은 이중첩자를 잡기 위해 은퇴한 마스터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가 뛰어든다는 이야기 자체는 대부분 남아있지만, 순서를 바꾸고 의미를 변환하고 연관 관계를 재구성했지요. 예를 들어 남자기숙학교에서 시작되는 프롤로그는 영화 중간으로 옮겨갔고, 중반 이후에야 실체가 밝혀지는 테스터파이 작전은 맨 앞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이 되는 리키 타의 고백 역시 중반으로 갔고 사건들의 연결성도 조금 다릅니다. 그러는 동안 사건들도 조금씩 바뀌었는데, 모두 르 카레의 소설보다 더 폭력적입니다. 시체들이 늘어났고 더 잔인하고 피투성이입니다.

이 변형의 결과 영화는 더 따라가기 쉬워졌습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덜 복잡한 건 아니죠. 단지 이렇게 하니까 2시간 조금 넘는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의 복잡성이 552쪽(국내번역본 기준) 분량 장편소설의 복잡성과 비슷해진 겁니다.

당연히 이 과정 중 잃은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 여전히 프롤로그가 학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중간에 뛰어드니까 오히려 짐 프리도의 캐릭터가 비중을 잃고 기능적이 된 경향이 있죠. 하지만 영화만 본 관객들은 이게 특별히 거슬리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각색 이후 영화의 미로가 더 단순해져 이해하기 쉬워진 것이 꼭 장점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르 카레의 소설에서 미로의 복잡성은 그 자체로 소설 내용의 중요한 일부였으니까요.

그러나 영화로 옮겨지면서 얻는 것 역시 많습니다. 다들 그리 영화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결과물은 예상 외로 달라요. 이건 2011년에 70년대 초를 무대로 하는 소설을 다시 읽는 것과 비슷합니다. 영화라는 시청각매체로 옮겨지자 당시에는 눈여겨 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70년대라는 시대가 보다 분명하게 보이고 그 시대의 한계에 갇힌 사람들이 보다 분명히 인식되는 거죠.

영화는 예상 외로 아름답습니다. 거의 배우들의 대갈치기로 일관했던 텔레비전 시리즈와 비교하면 더욱 그래요. 이 영화의 카메라는 끊임없이 우리가 보는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결과물은 새롭다기보다는 전통적입니다. 선악과 피아의 구분이 어려운 회색지대에서 확신할 수 없는 일에 몰두하는 우울하고 불안한 전문가들. 이게 바로 냉전시대 스파이 물의 진짜 매력이 아니겠습니까? 알프레드손이 택한 회갈색 색조의 와이드스크린 화면은 바로 그런 세계를 온 몸으로 구체화합니다. 종종 비영화적이라 느껴지는 장면들이 바로 이 '영화'의 느낌 때문에 대조가 되어 빛을 발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스마일리가 카를라와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는 부분은 플래시백의 개입없이 그냥 배우의 대사만으로 처리되는데, 그 때문에 캐릭터와 회고가 더 강하게 연결되는 거죠.

범인찾기와 진상폭로의 클라이맥스가 주는 쾌락은 없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영화의 일부이고 소설의 일부이죠. 이 우울한 추적의 이야기에서 누가 범인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네 명의 용의자들 중 다른 누가 범인이어도 바뀌는 건 거의 없었을 겁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모두가 배반자가 될 수 있는 세계의 임의성이야말로 영화가 그리려는 바로 그 세계의 성격을 대표하니까요.

빵빵한 배우들로 무장한 영화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당연히 조지 스마일리를 연기한 게리 올드먼에 쏠려 있을 겁니다.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알렉 기네스가 거의 표준을 세워놓은 역이니까요.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알렉 기네스가 미니멀한 정확성으로 꼭 필요한 것만 연기를 한다면, 게리 올드먼은 뭐랄까, 조금 지저분한 스핑크스와 같습니다. 분장과 연기가 만들어내는 디테일이 풍성하긴 한데, 그것들이 도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확신이 안 서는 이상한 무표정인 거죠. 이건 전혀 다른 접근법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좋은 연기라고는 못하겠습니다. 올드먼의 연기 또한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12/02/05) 

★★★☆

기타등등
1. 냉전시대 스파이물에서 소련 스파이 역할을 진짜 러시아 배우, 그것도 상당한 비중의 스타가 연기하는 시대가 왔다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2. 원작의 체코슬로바키아가 영화에서는 헝가리로 바뀌었습니다. 제작비 때문인 모양인데, 그래도 조금 불만. 1973년이라면 체코가 더 잘 어울립니다. 


감독: Tomas Alfredson, 출연: Gary Oldman, Toby Jones, Ciarán Hinds, Colin Firth, Benedict Cumberbatch, Tom Hardy, Mark  Strong, John Hurt, Simon McBurney, Kathy Burke, Konstantin Khabenskiy, Svetlana Khodchenkova


IMDb http://www.imdb.com/title/tt134080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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