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 (2012)

2012.03.07 00:17

DJUNA 조회 수:12760


김탁환의 역사소설 [노서아 가비]의 모티브가 된 건 황현의 [매천야록]에 기록된 김홍륙이라는 인물입니다. 천민출신의 역관이었던 그는 아관파천 당시 고종과 러시아 공사 베베르 사이의 통역을 맡으면서 고종의 총애를 받았죠. 하지만 왕의 빽을 믿고 설치다가 결국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떠나기 직전에 고종의 커피에 아편을 타 독살하려다 들켜서 참수되었습니다.

[노서아 가비]에서 김탁환은 김홍륙의 일생을 그대로 그리는 대신, 이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전혀 새로운 인물들을 짜냈습니다. 김홍륙을 모델로 이반이라는 사기꾼을 만들었고, 그의 여자친구이며 동업자인 따냐라는 사람을 만들었어요. 정확한 창작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그 과정 중 순수한 가공인물인 따냐가 이반의 자리를 밀어내고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님 말고.

수월하게 읽히긴 하지만 엄청나게 재미있는 소설은 아닙니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가공인물로 이야기를 풀어도 플롯이 고종암살미수라는 구체적인 사건의 인질이 될 수밖에 없거든요. 여기서 벗어나면 정작 작가가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 보이고요. 초반엔 맹랑한 주인공을 신나게 따라가다가 끝날 무렵엔 "뭐야, 이게 다야?"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죠.

그래도 소설은 인기를 끌었는데, 그건 내용 자체보다는 캐릭터와 설정 포장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19세기 말을 사는 조선인 여성이면서도 여러나라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코스모폴리탄인데다가, 고종 암살 미수라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왕의 커피를 전담한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입니다. 이야기의 매력보다 복고 스타일의 [엘르 코리아] 화보와 같은 이미지의 작품인 거죠. 출판 직후 영화화 이야기가 나온 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 소설의 영화화에는 분명한 장단점이 있습니다.

장점은 주인공과 소재입니다. [노서아 가비]의 사기꾼 따냐는 정말 신나는 여자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도덕적이고 뻔뻔스러우며, 애국심이나 사랑에 발목 잡히지 않는 사기꾼이죠. 구한말 배경의 픽션에 이런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 적 있었던가요? 잘만 다듬으면 진짜 작품이 나올 수도 있는 겁니다. 게다가 고종의 커피 애호 취미는 잘 알려져 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다루어진 적 없는 소재죠. 여기에 암살 음모와 첩보를 곁들이면 그럴싸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단점은 소재의 위험성에 있습니다. 이 소설의 영화화에는 다국적 문화와 언어의 묘사가 필수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이걸 지독하게 못합니다. 구한말은 더욱 그래요. 이런 묘사를 제대로 하려면 (자신들의 것을 포함한)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필수적인데, 우린 여기에 영 엉망이지요. 특히 아관파천 시절이라면 울분 때문에 제대로 소재를 보지도 못합니다. 때가 때이고 소재가 소재이니, 이해야 충분히 가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존심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면 작업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죠. 자기 작품에 흥분하는 포르노 제작자가 제대로 된 작품을 낼 수 없는 것처럼.

[노서아 가비]를 각색한 장윤현의 [가비]는 아쉽게도 장점을 몽땅 버리고 단점만을 따라갑니다. 장윤현이 이 작품을 제대로 통제한 게 사실이라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는 제가 이 책에서 보았던 장점을 전혀 못 봤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소설을 차별화하는 장치나 재료들을 몽땅 버리고 이를 익숙한 이야기로 돌립니다. 애국심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사기꾼 일당들의 경쾌한 모험극이어야 마땅한 이야기가 애국심 충만 신파가 되어버립니다.

영화의 내용요... 역관의 딸인 따냐와 일리치는 따냐의 아버지가 정체불명의 악당들에게 살해당한 뒤부터 함께 지낸 연인 사이로 (네, 여기서부터 다릅니다. 둘이 운명적으로 만나 연애하는 이야기는 기대도 마시길.) 러시아에서 강도질로 먹고 살다가 일본 스파이들에게 잡혀 스파이로 포섭됩니다. 이들의 최종 목적은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 있는 고종을 독살하는 것이죠. 일리치는 일본군으로 위장해 공사관 주변을 얼쩡거리고, 따냐는 러시아에서 만난 민영환을 따라 왔다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에 빠진 고종을 위해 커피를 만들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러는 동안 두 주인공이 비분강개한 애국자가 되어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다는 점은 밝혀도 될 것 같습니다. 하암.

그 시절에 비분강개한 애국자가 되는 것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화에서 비분강개한 애국자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일단 기존의 캐릭터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인 심리묘사를 거쳐야 하죠. 그게 어렵다면 쉽게 비분강개할 수 있고 그게 재미있는 캐릭터를 따로 만들거나요. 어느 경우건 여기에, 관객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넣어야 합니다.

이 영화는 그 중 어느 것도 안 합니다. 두 주인공은 원작에서 튀어나온 것 같긴 한데, 원작이 캐릭터들과는 달리 분명한 개성도 의지도 없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사기꾼짓을 하는 것과 협박에 못 이겨 스파이질을 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니 스토리가 벌어지는 건 이해가 되겠는데, 이 새로운 상황을 제대로 된 드라마로 전환시키지 못해요. 신선했던 소재가 익숙한 상황과 정서로 떨어지니 그나마 원작이 갖고 있던 재미도 사라지고 이야기는 한없이 촌스러워집니다. 이 소재와 이 캐릭터로 이렇게 징징거리는 영화가 나올 줄 몰랐어요. 거의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원작에서 영화적으로 재미있었을 것 같은 장면들은 다 잘려나갔습니다.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습니다. 제작비와 기타 등등의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전 따냐가 아빠가 물려준 화약 덩어리로 악당들을 무심한 듯 쿨하게 날려버리는 장면 같은 걸 지워버린 건 용서가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이 서걱서걱 잘려나가니 캐릭터가 조금씩 죽죠. 캐릭터가 죽은 건 일리치도 마찬가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이기적인 악당인 게 매력이어야 할 인물을 앞에 놓고 온갖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신파를 시키니 살아남을 수가 없죠. 그러면서 폼은 엄청 잡게 하니, 보고 있으면 [황진이] 시절 유지태 악몽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원작에서 매력으로 보였던 다문화, 다언어의 환경도 이 영화에서는 거의 재앙입니다. 일단 이 영화가 제대로 통하려면 배우들이 러시아어와 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언어라는 게 딕션만 대충 배워 암기한다고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 상태에서 언어는 여전히 서툴 수밖에 없고, 그 서툰 언어를 암기해 읊는 과정은 연기 자체에 해를 끼칩니다. 게다가 언어는 언어로만 존재하지 않아요. 그 뒤에 깔려 있는 문화도 중요하죠. 하지만 이 영화의 자기중심적 태도로는 그 너머까지는 가지도 못합니다. 영화에 남는 건 번역된 대사를 뜻도 모르고 어색하게 읊으며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 뿐인데, 보고 있노라면 손발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하긴 이런 실질적인 문제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원작도 여기에서 완전히 무죄가 아니긴 하죠. 하여간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이게 결코 손쉬운 재료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애국적 의무감을 느끼는 거 같습니다. 심지어 그런 걸 일부러 거부하는 원작을 택할 때도요. 누가 애국하지 말랍니까. 하지만 스토리텔러가 그런 제한에 갇혀 있으면 일을 제대로 못 하잖습니까. 왜 조금 몸을 풀 생각을 못하는 거죠? 재미있는 이야기나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싫습니까? 의외의 스토리 전개가 싫은가요? 역사적 사실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생각은 없나요? 이런 거 하면 경찰이 잡아갈 것 같습니까? (12/03/07) 

★★

기타등등
1. 장윤현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여자들이 싫은 걸까요. [황진이]와 [가비]가 장윤현의 여성상을 반영하는 거라면 그건 그냥 슬픈 일이죠. 그렇다고 제가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휴우.

2. 왜 우리나라 사극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외래어와 고유명사에 신경을 안 쓰는 건가요? 그것처럼 시대를 정확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반영하는 것도 없는데. 구한말 조선에서 러시아를 러시아라고, 커피를 커피라고 발음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심지어 원작소설 제목도 [노서아 가비]가 아닙니까?

3. 도대체 왜 '노서아'를 빼고 [가비]만 남겨놓았을까요? 그건 그냥 [커피]입니다. 이상한 제목 같지 않나요?

4. 왜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외국 연기자 이름을 크레딧에 올릴 때 퍼스트 네임만 박는 거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예요? 


감독: 장윤현, 출연: 김소연, 주진모, 박희순, 유선, 조덕현, 김현아, 다른 제목: Gabi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Gabi.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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