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 한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수잔 존슨의 넷플릭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를 보고 있으면 10대 아이들이 주인공인 로맨틱 코미디가 한참 유행이던 1990년대로 돌아간 것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단지 당시엔 이 영화들이 극장에서 상영되었고 보통 비스타 비율이었으며 주인공 역할이 아시아계 배우에게 돌아가지는 않았지요.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영화 유행, 배급 방식, 극장 구조 그리고 인종배분에 대한 인식이 이만큼 바뀌었던 것입니다.

조금 인공적인 셋업으로 시작해서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플롯으로 흘러가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라라 진 커비는 홀아비 산부인과 의사인 아버지와 막 스코틀랜드로 유학가려는 언니 마고, 동생 키티와 살고 있습니다. 라라 진은 자기가 좋아했던 남자들에게 열정적인 고백 편지를 쓴 다음 보내지 않고 상자에 보관해놓았는데, 그만 누가 그 편지를 진짜로 보내버렸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얼마 전에 언니와 헤어진 언니의 남자친구 조시도 포함되어 있었죠. 민망해진 라라 진은 조시가 보는 앞에서 편지 2번을 받은 피터와 키스를 하고 가짜 연애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예상대로 흐릅니다. 매우 90년대스럽고... 조금은 한국 드라마 같습니다. 원작자 제니 한은 이 플롯을 짜는 동안 [풀하우스]와 같은 한국 드라마의 영향도 받았다는군요.

처음부터 새로운 무언가가 되거나 반전으로 관객들을 놀래키려 한 영화는 아닙니다. 편지를 부친 범인은 후반에야 밝혀지지만 누군지는 뻔하지요. 피터와의 계약 연애가 어느 방향으로 흐를 지는 라라 진만 빼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한국계 혼혈이라는 건 차별점이지만 영화는 이걸 심각하게 다룰 생각은 없어요. 라라 진은 한국계라는 것보다 전형적인 10대 주인공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긴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것일 수도 있겠어요. 아시아계 주인공이 미국 장르 영화에서 당연하다는 듯 편안하게 정상성을 획득한 것입니다.

중요한 건 셋업이나 줄거리가 아니라 이를 통해 16살의 위험한 지대를 통과하는 주인공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 과정 중 첫사랑(과 두 번째 사랑)의 아슬아슬한 감정을 끄집어내 관객들을 기분좋게 자극하는 것입니다. 영화는 원작소설보다 스토리에 더 신경을 쓰고 일상 묘사를 줄였지만 라라 진의 캐릭터는 그대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위태롭고 충분히 한심하지만 그만큼이나 영리하고 열정적이어서 쉽게 감정이입될 수 있는 주인공이죠.

캐스팅이 중요하면서도 조금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영화인데, 라라 진을 연기한 라나 콘도어는 적절한 선택입니다. 귀엽고 야무지면서도 도저히 비밀을 숨길 수 없는, 적절하게 열려있는 얼굴을 갖고 있지요. 피터 역을 맡은 노아 센티네오, 그리고 자매 역할의 애나 캐스카트, 자넬 패리시와의 합도 좋고요. 단지 초반엔 피터와 조시의 얼굴을 구별하느라 좀 애를 먹었어요. 둘 다 감독 취향이었을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차별화되는 외모의 배우였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죠. (18/08/18)

★★★

기타등등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즈]도 이번 주에 개봉되었지요. 날짜를 일부러 맞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의 아시아계 배우들과 관객들에겐 여러 모로 특별한 주였습니다.


감독: Susan Johnson, 배우: Lana Condor, Noah Centineo, Janel Parrish, Anna Cathcart, Andrew Bachelor, Trezzo Mahoro, Madeleine Arthur, Emilija Baranac, Israel Broussard, John Corbett, 다른 제목:

IMDb https://www.imdb.com/title/tt3846674/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6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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