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플래너건이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을 '현대적으로 다시 상상한' 넷플릭스 드라마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 흥분했고 동시에 걱정이 됐습니다. 플래너건은 분명 얀 드 봉의 [더 헌팅]보다 나은 작품을 내놓겠죠. 하지만 '현대적으로 다시 상상'한다는 게 무슨 뜻이죠? 과연 [힐 하우스의 유령]에 새로 재해석할 뭔가가 남아있긴 할까요? 리처드 매드슨에서부터 스티븐 킹에 이르기까지, '귀신들린 집' 이야기를 하려는 수많은 이야기꾼이 이미 셜리 잭슨의 길을 따랐잖아요. 그리고 이런 식의 재해석 과정 중 셜리 잭슨의 개성과 매력이 얼마나 남을 수 있을까요?

걱정 반 흥분 반으로 어제부터 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끝냈어요. [호랑이는 겁이 없지]를 보러 중간에 나갔던 몇 시간을 제외하면 그냥 논스톱으로 봤던 거죠. 넷플릭스 시리즈 중 [힐 하우스의 유령]처럼 집중하면서 본 작품은 없었어요.

줄거리 요약만 보면 시리즈는 셜리 잭슨의 원작에 그렇게 충실해보이지는 않습니다. 90년대 초, 엄마, 아빠, 다섯 아이들이 힐 하우스라는 저택에 이사옵니다. 엄마와 아빠는 여름 동안 이 저택을 수리해서 비싼 값으로 팔고 그 돈으로 가족이 살 진짜 집다운 집을 지을 계획이죠. 하지만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가족은 도망치듯 저택을 떠납니다. 그리고 20여년 뒤, 끔찍한 비극을 겪은 이들은 다시 저택을 찾습니다. 정말 닮은 구석 하나 없잖아요. 이 정도면 굳이 셜리 잭슨 원작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듯 한데...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 의외로 원작과 로버트 와이즈의 첫번째 영화 흔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스토리가 달라보이긴 해요. 하지만 셜리 잭슨이 창조한 캐릭터, 드라마, 고유명사들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들에겐 여전히 원작과의 연결 고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작의 영매인 테오는 이 시리즈에서 가족의 셋째 딸이고 사이코메트리 능력이 있는 아동심리학자가 되었는데, 원작처럼 동성애자입니다. 원작의 주인공인 엘레노어는 이 영화에서 넬이라고 불리는 막내 딸이고 역시 원작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결말을 맞습니다. 원작을 큰 덩어리로 해체해서 다른 모양의 건축물을 지었다고 할까요? 원작을 몰라도 감상엔 전혀 지장이 없지만 원작을 아는 관객들에겐 여기저기 힌트와 윙크, 무엇보다 원작자에 대한 존중이 보이는 작품입니다.

원작의 독자라면 시리즈가 초자연현상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궁금해할 것입니다. 원작이나 로버트 와이즈의 영화는 유령 같은 걸 제대로 안 보여주는 것으로 악명 높잖아요. 얀 드 봉의 작품이 망한 건 이런 원작을 갖고 특수 효과를 잔뜩 쓴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고요.

플래너건은 와이즈처럼 은밀한 길을 택하지는 않습니다. 이 시리즈에선 유령들과 초자연현상이 전면으로 드러납니다. 목 꺾인 여자, 모자 쓴 거인처럼 성격이 분명한 유령들도 많고요. 단지 그는 특수효과나 분장에 이야기가 잡아먹히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시리즈의 중심은 일곱 명의 크레인 가족으로, 초자연현상은 그들의 성격, 고민, 고통, 갈등과 연결되어 존재합니다. 그리고 플래너건은 이들을 살아 숨쉬는 인간들로 묘사하기 위해 열 시간의 러닝타임을 아주 야무지게 써먹습니다.

[힐 하우스의 유령]의 장점은 이 작품이 아홉 개의 클리프행어가 있는 지루한 열 시간 짜리 영화가 아니라 (대부분 넷플릭스 오리지널 마블 시리즈가 그렇지 않나요) 제대로 된 드라마 시리즈라는 것입니다. 작품을 이루는 열 개의 에피소드는 모두 기승전결이 분명한 각자의 개성을 가진 완결된 이야기들입니다. 열 시간의 러닝타임에도 이야기가 늘어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그러면서도 이들은 시계장치처럼 정교하게 서로와 연결되어 있어요. 당연히 원작의 모호함은 많이 줄 수밖에 없지만 그 빈 자리를 채울 장점도 그만큼 많습니다.

시리즈를 완주하면서 셜리 잭슨만큼이나 스티븐 킹이 떠올랐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의 구조부터가 [그것]을 연상시키니까요. 플래너건이 스티븐 킹을 읽고 자란 70년대생 호러광이기 때문에, 그 영향 밑에서 킹의 선배인 작가의 작품을 재료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창작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겠죠. 플래너건의 이 귀신 이야기에는 지난 반 세기 동안 영미권 호러 예술이 쌓아온 수많은 재료와 스타일이 창의적으로 얽혀있습니다.

완벽한 작품은 아닙니다. 모두에게 무서운 작품은 아닐 거고요.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로버트 와이즈 버전을 넘어서는 작품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두 작품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좋죠.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이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가 얀 드 봉의 영화 따위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부지런하고 무섭고 재미있고 무엇보다 무척이나 인간적인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18/10/21)

★★★☆

기타등등
와이즈의 [더 헌팅]에서 루크로 나왔던 러스 탬블린이 이 영화에서는 넬리의 상담의인 몬태규 박사로 나옵니다. 이 짧은 문장에 윙크가 몇 개나 숨어 있는 건가요.


감독: Mike Flanagan, 배우: Carla Gugino, Michiel Huisman, Victoria Pedretti, Henry Thomas, Oliver Jackson-Cohen, Elizabeth Reaser, Kate Siegel, Paxton Singleton, Mckenna Grace, Julian Hilliard, Violet McGraw, Anthony Ruivivar, Samantha Sloyan, Lulu Wilson, May Badr, Annabeth Gish, Timothy Hutton, Robert Longstreet, Olive Elise Abercrombie, Logan Medina

IMDb https://www.imdb.com/title/tt6763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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