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 베프 Irma Vep (2022)

2023.03.18 23:58

DJUNA 조회 수:2574


[이마 베프]는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감독한 8부작 시리즈입니다. 미국에서는 HBO MAX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1996년에 만든 영화판 [이마 베프]를 먼저 본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이걸 설명하는 건 꽤 까다로워요. 이 리뷰에서 가장 골치가 아픈 부분인데 그래도 해볼게요.

일단 영화판 [이마 베프] 이야기부터. 이 영화는 로제 비달이라는 한물간 영화감독이 루이 푀이야드의 무성영화 고전 [흡혈귀들]을 리메이크하는 과정의 이야기입니다. 이 미친 인간은 이 영화를 무성영화로 리메이크하는데, 당연히 잘 될 리가 없지요.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비달이 (반쯤 허구의 인물인) 장만옥을 [흡혈귀들]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이마 베프로 캐스팅했다는 것입니다. 아사야스는 이 영화를 찍고 나서 (캐릭터가 아닌 배우. 당연하지만) 장만옥과 결혼했다가 이혼했습니다. 그 사이에 장만옥은 아사야스의 [클린]으로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요.

미니 시리즈 버전 [이마 베프]도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로제 비달이라는 한물간 영화감독이 루이 푀이야드의 [흡혈귀들]을 OTT 시리즈로 리메이크하려고 하죠. 단지 이번 비달은 저번 비달보다는 상식적인 사람이라 와이드스크린 비율의 영어 시리즈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할리우드 배우 미라 하버그 (스웨덴 사람이니까 미라 하베리라고 표기하겠죠?)를 이마 베프 역으로 캐스팅합니다. 그리고 영화판 [이마 베프]에서 일어났던 것과 거의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웃기는 거. 이 시리즈의 르네 비달은 이미 [흡혈귀들]을 인디 영화로 한 번 리메이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세계의 장만옥인 제이드 리라는 홍콩 배우를 캐스팅해서요. 그리고 두 사람은 실제 아사야스와 장만옥이 그랬던 것처럼 결혼했다가 이혼했습니다. 시리즈 중반엔 정말로 [이마 베프]의 장만옥 클립이 삽입되기도 해요. 그리고 이 시리즈에서 비달을 연기한 뱅상 마카뉴는 시리즈 내내 아사야스의 성대모사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이 작품은 과거에 자신이 만든 (고전을 리메이크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의 리메이크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아사야스 자신이 겪었던 경험의 반추이고 회고이기도 하지요. 도대체 레이어가 몇 겹이에요?

이러니까 배배 꼬인 아트하우스물 같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사야스의 작품이 아주 이해하기 어려웠던 적은 별로 없지요. 이 작품도 일단 설정만 이해한다면 따라잡기 쉽습니다. 오히려 종종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다는 느낌이에요. 푀아야드의 원작에서 소제목을 따온 각각의 챕터들은 각각 전담하고 있는 주제들이 있고 이것들은 당시 찍고 있는 에피소드와 연결되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로제 비달의 리메이크도 그렇게까지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대사가 붙고 컬러여서 더 그럴싸해 보이지만 역시 지나치게 원작에 충실해요. 루이 푀이야드의 영화가 재미있는 건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의 틀 안에서 완벽하게 먹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죠. 21세기에 리메이크하려면 기본 설정만 남겨놓고 완전히 새로 작업을 해야 하고 그게 또 원작에 대한 예의겠지요. 하지만 비달의 시리즈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흡혈귀들]이라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리즈 안에서 하기 위한 재료니까요. 그 목적 때문에 종종 촬영 현장의 묘사가 이상해지곤 합니다. 일단 비달은 시리즈를 순서대로 찍어요. 그리고 종종 이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원작도 모르고 각본도 안 읽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아니, 이건 사실주의인가.

비달의 [흡혈귀들]은 더럽게 재미없고 밋밋해보이지만 그걸 찍는 [이마 베프]는 끝까지 생동감이 넘칩니다. 일단 아사야스는 업계 내부 이야기를 잔뜩 알고 있고 그걸 각 챕터의 주제와 엮어 상당히 재미있기 끌어갑니다. 그건 수퍼히어로 영화의 유행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고 영화와 시리즈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죠. (이 영화의 비달은 자신이 여전히 '영화'를 찍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긴 같은 시리즈의 구성을 갖춘 푀이야드의 원작도 '영화'니까요.) 여기엔 시청자들의 관심을 자극하는 스타들의 스캔들도 있고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게 늘 깊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슈퍼히어로 영화 유행에 대한 이야기는 그런 영화들처럼 얄팍하고요. 그리고 전 아사야스의 퀴어 여성 묘사가 늘 오타쿠적인 상상에 의존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 민망함을 커버해주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은폐되는 건 아니죠.

어떤 부분에서 아사야스는 조심스럽게 솔직합니다. 영화 [이마 베프]는 이마 베프에 대한 페티시즘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면서도 거기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영화였지요. 하지만 이번 시리즈는 여기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합니다. 비달은 [어벤저스] 시리즈의 엠마 필을 통해 여성 액션 주인공에 대한 페티시즘을 키워왔다고 고백하는데, 아사야스가 55년생이니까... 정말 그럴 나이네요. 이 고백은 당연히 긍정적인데, 비달이 미라 하버그에게서 인정을 받는 장면은 너무 소망 성취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타쿠들은 그냥 자기가 변태라는 걸 인정하고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까?

원작 [이마 베프]의 주제는 조금 더 발전합니다. 일단 [이마 베프]는 빙의를 다룬 일종의 귀신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무시도라가 연기한 이마 베프의 캐릭터가 장만옥이 연기하는 장만옥 캐릭터에 스며들고, 장만옥이 영화 속 이마 베프처럼 물건을 훔치는 부분은 그 이야기의 하일라이트였고 이 영화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시리즈에서 이 주제는 장만옥과 96년 버전 [이마 베프]를 거치면서 더 광대해졌습니다. 그리고 원작처럼 '시네마'라는 느낌이 드는 건 아니지만 이를 상당히 매혹적인 방법으로 해치우고 있지요. 그러니까 정말 해볼만한 리메이크 또는 속편이었습니다. 영화 세계가 지난 20여년 동안 겪어온 변화가 원작이 마련해 준 자리에 새로운 소재와 주제를 잔뜩 부어주었고 그건 이 작품의 존재 의미와 연결되었던 겁니다. (23/03/18)

★★★☆

기타등등
1. 1996년에 루이 푀이야드의 영화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소수 영화광과 전문가가 전부였습니다. 본 사람들은 더 적었고요. 하지만 2020년대엔 푀이야드를 알고 [흡혈귀들]을 본 사람은 훨씬 많아졌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사야스가 [이마 베프]를 통해 소개했기 때문이고 그 다음은 유튜브를 통해 모두가 이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미라 하버그는 이마 베프가 납치당하는 장면이 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궁금해 하는데요. 아, 그것도 아사야스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2. 이마 베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표기지요. 영어권 사람들은 어마 벱이라고 읽습니다. 수입되기 전 표기는 이르마 벱이었는데요.

3. 영어와 프랑스어가 뒤섞인 영화입니다. 웨이브에서는 프랑스어 대사가 나오고 영어 자막이 붙는 장면에서는 한국어 자막을 위로 올렸는데, 그 때문에 종종 배우들의 얼굴이 안 보였습니다. 옆으로 밀거나하는 방법이 있었을 텐데요.


감독: Olivier Assayas, 배우: Alicia Vikander, Vincent Macaigne, Adria Arjona, Byron Bowers, Jeanne Balibar, Vincent Lacoste, Nora Hamzawi, Hippolyte Girardot, Devon Ross, Alex Descas, Antoine Reinartz, Lars Eidinger

IMDb https://www.imdb.com/title/tt13649314/
Naver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aver?code=225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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