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전 (2011)

2011.07.12 11:51

DJUNA 조회 수:18661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터져서 1953년 7월 27일에 끝났죠. 51년 6월 전선교착 하에 2년 2개월 동안 길고 지리한 휴전협정이 진행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중부전선에서는 공방전이 계속되었고요. 이 정도면 최전방의 끔찍한 상황이 일상화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전쟁판 시지푸스의 신화인 거죠.


장훈의 [고지전]의 무대인 동부전선 최전방 애록고지는 그런 시지푸스스러움을 극대화시킨 곳입니다. 고지의 주인은 이미 수십 번 바뀌었고,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변화 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건 양측 군인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관계를 맺게 될까요. 여기서 어떤 특별한 변화를 상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영화는 초반에 그런 힌트를 던지면서 시작됩니다. 애록고지의 악어중대 중대장 시체에서 아군의 총알이 발견되었고(그 난장판 속에서 그건 어떻게 확인했을까요), 북한군이 남한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남한측 군사우편을 통해 전달되었던 거죠. 상부에서는 적과 내통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의심 하에 방첩대 중위 강은표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실종된 줄 알았던 친구 김수혁이 중대의 실질적인 리더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지요.


영화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스포일러가 되니까 공개하지는 않겠지만, 길게 끄는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둘 다 모두 최전방의 군인들 사이엔 외부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는 자체 논리가 형성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죠. 두 번째 비밀의 정체는 많이 닭살스러운 구석이 있긴 합니다만, 우리와 같은 인터넷 시대를 사는 관객들에게는 충분히 이해가 갈 겁니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맺는 관계와 오프라인에서 맺는 관계가 늘 같지는 않죠.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연대감이 괴상한 방식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가 꽤 있습니다.


영화의 전반부는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전쟁 묘사도 좋지만 바로 그런 심리 묘사의 디테일 때문이죠. 여전히 군인들은 필사적으로 싸우고 주변에서는 전우들이 죽어나가지만, 이들은 이 상황에서 일반 전쟁영화와는 조금 다르게 행동합니다. 매체에 비유를 한다면, 이들의 전쟁은 극영화가 아니라 연속극인 거죠. 물론 이들에게 새로 들어온 신임 중대장은 북한군만큼이나 더 고약한 적입니다.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하나의 지도에 가깝습니다. 따로 떨어져 있으면 전형적이거나 친숙하죠. 하지만 이들이 선으로 이어지면 애록고지 특유의 지형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이 지형이 진짜로 특별해질 때는 그 선이 은근슬쩍 북한을 넘어갈 때입니다. 특히 전설의 북한 저격수 '2초'와 남한 군인들의 관계는 그렇습니다. (와, 그리고 옥빈양 예쁩니다.)


간결하고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던 영화는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슬슬 힘을 잃습니다. 특히 휴전협정 이후로는 문제가 심각합니다. 한마디로 너무 길고 장황해요. 우연인지, 그 때부터는 음악도 나빠지지요. [JSA]의 원작자 박상연 작가는 이 영화를 통해 할 말이 무지무지 많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가려고 하니까 그것들을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는 듯 기관총처럼 마구 쏘아대요. 그 대부분은 굳이 문장으로 만들지 않아도 관객들이 다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슬프게도 이 논리는 영화가 비판하려는 전쟁의 비극적인 상황과 닮았습니다. 휴전되기 전에 필사적인 고지쟁탈. 그건 다 쓸모 없는 거거든요.


전 아직도 늦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냥 가위질만 해도 엄청나게 개선될 수 있어요. 아무리 작가가 피고름으로 쓴 각본이고, 연기자와 보조출연자와 스태프들이 눈물 범벅이 되어가며 그 장면을 만들었다고 해도 늘어지고 방해가 되면 그냥 잘라야 하는 겁니다. (11/07/12)


★★★


기타등등

신라시대도 아니고 겨우 60년 전의 과거를 그리면서, 작가들이 당시 언어의 디테일을 재현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저에게 늘 신기해보입니다. 완벽한 복원은 기대도 않습니다만, 욕과 억양, 어휘를 조금씩만 손보아도 그럴 듯해 보일 텐데 말입니다. 특히 욕에 대한 무관심은 괴상해요. 가장 시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게 욕과 비속어거든요. 궁금해서라도 연구해보고 싶지 않나요? 저 같으면 그럴 것 같은데.

 

감독: 장훈, 출연: 신하균, 고수, 류승수, 고창석, 이제훈, 조진웅, 정인기, 이다윗, 류승룡, 김옥빈, 박영서, 다른 제목: The Front Line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The_Front_Line.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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