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드 투 킬 Dressed To Kill (1980)

2011.08.16 00:26

DJUNA 조회 수:15346


1970년대 말, 브라이언 드 팔마는 뉴욕 타임즈의 리포터 제럴드 워커가 쓴 소설 [크루징]을 각색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판권은 윌리엄 프리드킨에게 넘어갔고, 드 팔마는 자기가 쓴 각본에서 몇몇 아이디어들을 취해 [드레스드 투 킬]을 만들었지요. 제가 생각하기엔 잘 된 일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둘 다 악명 높은 영화지만, 그래도 [드레스드 투 킬] 쪽이 낫죠.


영화는 케이트 밀러라는 중년여성의 성적 일탈로 시작됩니다. 미술관에서 우연히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난 그녀는 그 남자의 뒤를 밟다가 결국 같이 자죠. 여기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들은 환상적입니다. 몇십 분간의 스토리가 진행되는 동안 대사가 거의 없는 실질적인 무성영화지요. 실제로 일어나는 일 자체는 대단치 않거나 평범하지만, 영화의 노골적으로 과시적인 테크닉 속에서 이들은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케이트 밀러의 이야기는 중간에 갑자기 끊어져 버립니다. 금발 가발에 선글래스를 쓴 여자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면도칼로 그녀를 살해해버리고 만 거죠. 살해현장은 고급 매춘부인 리즈 블레이크에 의해 목격되고, 리즈와 케이트의 아들 피터는 힘을 합쳐 범인을 잡으러 나섭니다. 그리고 아마 그들이 쫓는 범인은 케이트의 정신분석의인 로버트 엘리엇의 환자 바비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진상을 눈치채셨을 겁니다. 척 봐도 [싸이코]의 모방작이니까요. 갑작스러운 여자주인공의 퇴장, 칼을 휘두르는 살인마, 샤워신, 범인의 정체와 동기, 이를 모두 설명하는 정신과의사의 설명은 몽땅 [싸이코]를 모방하고 있지요. 물론 다른 작품의 영향도 있습니다. 미술관 장면은 [싸이코]보다 [현기증]을 더 닮았잖습니까.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죠.


이야기는 별로 안 중요합니다. 사실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히치콕의 [싸이코]에서도 이야기 자체는 가볍게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었죠. 이 원본이 다시 한 번 모사를 거쳤으니, 남아있던 진지함도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립니다. 남은 건 오마주와 패러디 그리고 요란한 스타일의 과시입니다. 그리고 드 팔마가 그런 과시에 온 몸을 바칠 때 영화는 가장 재미있습니다. 앞에 나온 미술관 장면도 그렇지만, 중반에서 리즈가 살인마와 흑인 갱단 양쪽에게 쫓기는 지하철 장면도 재미가 만만치 않죠. 정작 살인마의 진상이 밝혀지고 동기가 나름 진지하게 묘사되는 동안엔 "다 알고 있으니 빨리 넘겨!"라는 생각이 들지만.


무지무지하게 천박한 영화입니다. 첫 번째 노출 장면부터 영화는 소재를 우아하게 꾸밀 생각 따윈 하지도 않죠. 오히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반대로만 갑니다. 그 때문에 역시 천박하고 변태스러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우아하게 포장한 히치콕 영화들을 7,80년대의 악동이 해부해버린 모양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역시 존경의 뜻이겠죠. 아무럼요. (11/08/16)


★★★


기타등등

앤지 디킨슨 여사의 누드는 당연히 대역이랍니다.

 

감독: Brian De Palma, 배우: Michael Caine, Angie Dickinson, Nancy Allen, Keith Gordon, Dennis Franz, David Margulies


IMDb http://www.imdb.com/title/tt0080661/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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