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점심 The Song of Lunch (2010)

2011.05.12 09:17

DJUNA 조회 수:9122


영국 시인 크리스토퍼 리드는 2009년에 [The Song of Lunch]라는 시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이 얼마 전 KBS에서 [시와 점심]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동명 BBC 단막극의 원작입니다. 최초는 아니지만 꽤 독특한 시도이긴 해요.


15년 전에 헤어졌다가 소호의 이탈리아 식당에서 재회해 점심을 먹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남자는 틈틈이 시를 쓰는 출판사 편집자이고, 여자는 성공적인 소설가와 결혼해서 파리에 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이 재회에서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둘 중 어느 쪽도 재결합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남자 쪽의 기대가 조금 더 컸을 거예요.


중년남자의 자조가 50분의 러닝타임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남자 주인공은 지적이고 영리하지만,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자성하는 능력은 꽝입니다. 보다보면 여자가 왜 남자를 떠났는지, 왜 그게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보다보면 엉뚱하게도 홍상수 영화가 생각나기도 해요. 모두 찌질한 남자들의 자기고백이죠. 남자 주인공이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닮았어요.


형식적으로 보면, 드라마는 크리스토퍼 리드의 원작을 아주 충실하게 옮겼습니다. 원작 텍스트 그대로가 아무런 변형없이 그대로 들어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앨런 릭맨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리드의 시 대부분을 읊고, 가끔 나오는 대사들은 릭맨과 여자 주인공 역을 맡은 엠마 톰슨의 보다 전통적인 드라마 연기를 통해 보여집니다.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굳이 화면을 봐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화면에 나오는 것들은 리드가 시를 통해 그린 것들을 그대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도 이 작품은 이상하게 몰입도가 높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처음부터 원작의 텍스트에 항복하고 시작하는 접근법이 긴장감 넘치는 영화적 형식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이건 생각보다 영화적인 게임입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텍스트를 떼어내 그대로 화면에 옮겼던 브레송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매체의 속성은 주변 매체와 관계를 맺는 방법을 통해서도 정의될 수 있다고요.


배우의 힘이 큽니다. 앨런 릭맨과 엠마 톰슨은 그냥 보고 듣기만 해도 긴장되고 흥분되는 배우들입니다. 그들의 육체와 목소리를 통하면서 크리스토퍼 리드의 시는 텍스트로만 존재했을 때는 없었던 새로운 힘과 색을 얻습니다. 자막판을 방영한 건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11/05/12)


★★★☆


기타등등

1. 번역 제목이 맘에 안 듭니다. 시를 각색한 작품이라고 굳이 시를 앞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나요. [해리 포터] 시리즈가 소설 각색물이라고 [소설과 해리 포터]라고 쓰지는 않잖습니까. 


2. 두 주인공은 척 봐도 나이차가 별로 나지 않는 중년인데, 자막 번역에서는 여자만 존대를 하더군요. 에라이. 


3. 원래는 2.35:1로 촬영된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KBS에서는 16:9 비율로 방영했습니다만.

 

감독: Niall MacCormick, 출연: Alan Rickman, Emma Thompson, Andi Soric, Siubhan Harrison, Joseph Long, Georgina Sutcliffe, Christopher Grimes


IMDb http://www.imdb.com/title/tt1686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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