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모란: 여자 야쿠자 Hibotan Bakuto (1968)

(이 시리즈 리뷰들은 다 스포일러가 있어요. 근데 별로 안 중요합니다.)

전 [붉은 모란] 시리즈의 첫 편인 [붉은 모란: 여자 야쿠자]를 비교적 나중에 봤기 때문에, 언제나 야노 류코/오류/붉은 모란 여사가 어떻게 이 험악한 세상에 발을 디뎠는지 궁금했습니다. 물론 기본 정보는 갖고 있었죠. 아빠가 죽었다, 몰락한 야노 집안을 되살려야 한다... 하지만 같은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를 다섯 편 정도 연달아 보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지기 마련이죠.

결국 뒤늦게 [여자 야쿠자]를 봤는데, 조금 실망이었습니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어요. 그렇게 강도가 높다고는 할 수 없었고. 오류의 아버지가 죽은 건 사실이에요. 그 직후 결혼이 깨진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이야기는 좀 평범합니다. 오류의 아버지는 노상강도에게 당했어요. 야노 집안의 부하들은 한 명만 빼놓고 친척 아저씨가 (별다른 악의없이) 데려갔고요. 결혼은 신분 문제 때문에 어차피 쉽지 않았습니다. 비극이지만, 이 정도면 세상이 한꺼번에 무너질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전 [붉은 모란: 인협의 길]을 보면서 훨씬 험악한 이야기를 상상했었죠.

하지만 오류는 그 '훨씬 험악한' 일을 겪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대충 안주하고 다른 신랑감을 찾는 대신 직접 아버지의 원수를 찾으러 나서는 거죠. 전 이게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오류의 반항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죄송해요. 이제부터 저는 남자로 살겠어요!"라는 선언은 오류가 '여성'이라는 성을 자신의 행동과 의지를 막는 감옥으로 보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요즘 보면 이게 재미있긴 합니다. 오류는 남장을 하고 다니거나 그러진 않아요. 여전히 여성적인 매력을 감추지 않는 젊은 여성입니다. 그런데도 오류는 자신이 자유롭게 혼자 여행을 하고 (1편이 끝날 무렵) 야쿠자의 두목이 되고 폭력을 휘두른다는 이유로 자신의 욕망을 은폐하고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단 말이죠. 이게 어느 시대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이 한계가 붉은 모란 오류의 캐릭터를 정의하고 있는 건 분명해요.

여간 오류를 막고 있는 벽은 나중에 나올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높습니다. 이 영화는 오류가 스스로 일을 처리하게 내버려 두지 않아요. 이 사람은 시리즈 내내 고독한 남자 협객들과 희미하게 로맨틱한 관계를 유지하긴 하는데, 이 영화에서 오류를 돕는 협객 카타기리처럼 오류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카타기리는 끊임 없이 오류가 '여자'임을 상기시키고, 오류로부터 진실을 감추고, 심지어 복수를 방해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오류의 원수를 죽인 건 오류가 아니라 카타기리예요. "당신을 살인자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라나요. 어이가 없죠. 지금까지 오류가 총칼을 휘두르며 만든 시체 무더기를 못 봤나. 오류는 나중에 얼마나 열불이 터졌을까요.

복수담은 좀 갑갑하지만 악당은 재미있습니다. 오류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고 카타기리의 의형제인 (네, 그 때문에 카타기리가 그렇게 수상쩍게 굴었던 거죠) 카쿠라이는 일차원적 악당이 아니에요. 처음 그가 등장했을 때, 우린 그가 수상쩍기는 해도 적당히 말이 통하는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악하다기보다는 마음이 허약한 사람이죠. 그가 저지르는 악행들은 앞에 저지른 보다 작은 실수를 덮으는 시도입니다. 이러니 점점 나쁜 짓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영화 후반부에는 결국 진짜 나쁜 놈이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