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탄총을 든 부랑자]는 원래 [그라인드하우스] 중간에 삽입되었던 가짜 예고편들 중 하나였죠.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조금 더 인기있던 예고편 [마셰티]를 영화화하는 동안 제이슨 아이스너에 의해 소리소문도 없이 장편영화로 확장된 것이 바로 이 영화인 거죠.


제목만 봐도 내용이 보입니다. 루트거 하우어가 연기한 부랑자는 드레이크라는 악당이 지배하는 도시로 들어오는데, 거긴 진짜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견디다 못한 부랑자는 전당포에 가진 돈을 탈탈 털어 산탄총을 하나 산 다음 그걸 가지고 도시의 악당들을 때려잡습니다.


노골적인 우파 판타지고 남성 판타지죠. 그렇다고 해서 이런 판타지를 우파들과 남자들만 갖고 있으라는 법은 없을 겁니다. 누구나 한 번 법망을 피하는 악당들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깽판치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아이스너는 그라인드하우스의 틀을 알리바이로 삼아 이를 아주 작정하고 합니다. 원래부터 싸구려 저질로 만들어진 영화이니 거리낄 것도 없죠. 종종 저에겐 지나쳐보이는 장면들도 많이 나옵니다. 스쿨버스에 들어와 아이들을 화염방사기로 학살하고 타버린 시체를 들고나와 장난감처럼 방송국 카메라 앞에서 흔들어대는 놈들을 보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영화는 예상외로 저에게 강한 감정을 끌어내지 못했답니다. [산탄총을 든 부랑자]는 이상하게 가짜 같아요. 아무리 DI로 흉내를 내도 영화가 진짜 테크닉컬러 영화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요. 이 영화의 악당들은 진짜 악당보다는 진짜 악당을 흉내내는 캐나다 배우들처럼 보입니다. 70년대 그라인드하우스 영화엔 정말 벌레같은 악당들이 다 나왔지만, 이 영화의 드레이크 일당만큼 공허하게 비현실적인 인물들은 없었어요. 그들은 그냥 마네킹입니다. 그들이 벌이는 극단적인 폭력도 마찬가지로 공허할 수밖에. 중반이 지나자 전 그냥 반응하기가 귀찮았답니다.


악당들은 시시하지만 (그 때문에 영화의 재미 반이 날아갔지만) 그래도 주연은 제대로 뽑았습니다. 루트거 하우어는 가만히 있어도 폭발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대고, 아무리 주어진 대사가 (어색하게) 촌스러워도 그걸 셰익스피어처럼 근사하게 읊습니다. 영화는 가짜더라도 하우어는 아니에요. (11/07/22)


★★☆


기타등등

1. 비교적 정확한 번역이지만 산탄총을 든 부랑자라는 역어는 어색하고 설명적이군요. 원제의 무례함이 제대로 살아있지 않아요. 어쩔 수 없죠.


2. 대부분 캐나다인들은 능숙하게 미국인 흉내를 낼 수 있습니다만 언제나 그런 건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 티가 좀 심하게 나요. 특히 슬릭과 아이번 형제는. 심지어 둘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은근히 기크스러워서 검색해봤더니 브리클린이라고,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스포츠카라고요!

 

감독: Jason Eisener, 출연: Rutger Hauer, Molly Dunsworth, Brian Downey, Nick Bateman, Gregory Smith


IMDb http://www.imdb.com/title/tt1640459/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556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