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프리 (2010)

2010.09.08 14:18

DJUNA 조회 수:15508


1.

좋은 이야기부터 하죠. [그랑프리]라는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김태희가 예쁘다는 것입니다. 기수복 차림으로 나와도 예쁘고, 사복차림으로 제주도 초원을 질주해도 예쁩니다. 중간에 재롱둥이로 나오는 아역배우 박사랑도 예쁩니다. 제주도의 풍광 역시 화사하게 잘 찍었습니다. 고로 '세상도 험악한데, 예쁜 김태희가 (가끔 예쁜 꼬마와 함께) 제주도에서 말 타는 거나 구경하러 가자'라는 생각으로 극장을 찾으신다면 여러분은 손해볼 일이 없습니다.


2.

[그랑프리]라는 영화의 가장 나쁜 부분은 각본입니다. 이 영화는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려는 여자 기수의 이야기이니, 어쩔 수 없이 임수정이 나왔던 [각설탕]과 겹칠 수밖에 없습니다. 양윤호는 아마 그 문제를 피하기 위해 로맨스를 강조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 같으면 안 그랬겠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는 있는 선택입니다. 


문제는 로맨스를 넣었다는 게 아니라 그 로맨스의 질이 굉장히 나쁘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논리에 따르면 [그랑프리]의 로맨스는 사랑하는 말이 죽고 의욕을 잃은 여자주인공에게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설정해주는 종류의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자주인공 주희와 제주도에서 만난 청년 우석과의 관계는 흔한 바캉스 로맨스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며칠은 재미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기분이 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운명을 바꿀 정도는 아니죠. 그 때문에 영화는 이들의 관계를 대사를 통해 '설명'해야 합니다. 


그걸 자기도 알았는지, 영화는 더 무리를 합니다. 우석의 엄마까지 끌어들여, 거의 [로미오와 줄리엣] 스타일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를 두 겹으로 까는 거죠.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영화는 제주 4.3 사건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요. 대담한 시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 소재가 이야기에 잘 녹아들었을 때나 그렇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 모든 재료들은 그냥 어거지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각본이 대사를 넣고 설명을 해도 로맨스가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후반부에 나오는 경마 장면들도 힘을 잃게 됩니다. 기술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집중하고 흥분해야 할 포인트도 없습니다. 그냥 경마인 겁니다. 


3.

김태희의 연기는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호흡이 긴 장면에서는 가끔 표정이 증발한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사 구사는 좋은 편이고 리액션은 정확합니다. 이보다 훨씬 불안한 연기를 하는 전문배우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정도면 한 영화를 짊어질 스타로서 자기 일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전 양동근의 연기가 영화 내내 불안했습니다. 원래 이준기의 역이었던 캐릭터를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 같은데, 그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이 아닌지요. 이 영화에서 양동근이 보여주는 연기는 대부분 어울리지 않는 애드리브처럼 보이며(감독 말에 따르면 사실 그렇게 즉흥적인 연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만) 영화의 다른 부분과 따로 놉니다. 


고두심과 박근형은 노련한 배우들이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이 워낙 말도 안 되는 것이라, 그냥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들에겐 다른 영화를 따로 주는 게 좋았을 겁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건 아역배우 박사랑입니다. 역시 배우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 이 배우를 다루는 영화의 태도가 정말 싫었습니다. 철저하게 귀여운 소도구로만 아역배우를 소비하고 있는 게 보이는 걸요. 우선 애에게 억지로 시킨 제주도 사투리부터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4.

아마 경마를 소재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마사회가 지원하는 영화라니, 딕 프랜시스식 스릴러 같은 것은 어림 없을 거고요. 하지만 그를 고려한다고 해도 [그랑프리]의 이야기는 너무 성의가 없습니다. 진심은 전혀 없고 관객들의 얄팍한 기대에 호소하며 슬쩍 넘어가려는 사기꾼의 술수가 노골적입니다. 주연배우들이 은근히 감독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겠죠. (10/09/08)



기타등등

활주로 장면은 보면서 화가 나더군요. 멋있으려고 넣은 모양인데,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정말 모르는 겁니까?


감독: 양윤호, 출연: 김태희, 양동근, 고두심, 박근형, 송옥숙, 이혜은, 박사랑, 박희본, 송재림, 다른 제목: Grand Prix


Hancinema http://www.hancinema.net/korean_movie_Grand_Prix.php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442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