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정보도 없이 [정무문: 100대 1의 전설]을 보는 관객들은 도입부에서 얼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이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해 10만명이 넘는 노동인력을 유럽에 보냈다는 걸 아시나요? 아마 대부분 그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보신 적 없으실 걸요. 그 정보를 급하게 소화하기도 바쁜데, 갑자기 사방에 총알이 날아다니는 서부전선에서 견자단이 튀어나와 중국 무술 액션을 하면서 독일군을 때려잡고 있단 말이에요. 아, 그냥 이거로 영화 하나를 만들면 안 됩니까? 될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영화는 프롤로그가 끝나자마자 1925년의 상하이로 돌아가버립니다. 전 20세기 초반의 상하이를 정말로 좋아하니까 보통 때 같으면 좋은 뉴스라고 생각하겠지만, 도입부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많이 아쉽더군요.


그런데 [정무문] 리메이크에 왜 제1차 세계대전과 25년의 상하이가 나온답니까? 아무래도 이 영화는 이소룡이 나오는 [정무문]의 리메이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견자단이 나왔던 [정무문] 텔레비전 시리즈의 영화판 속편인 것 같아요. 후반부에 회상 장면으로 조금 나오는 게 텔레비전 시리즈의 클립이었던 건지? 몰라요. 전 그 시리즈 안 봤어요.


하여간 이 영화에서 주인공 진진은 프랑스에서 죽은 전우의 이름을 빌려 사업가로 행세하면서 애국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벌어진 요인 암살을 목격한 진진은 당시 히트 영화 속 영웅인 천산흑협의 (은근히 케이토스러운) 의상을 훔쳐 입고 암살자들을 때려잡아요. 그 뒤로 천산흑협으로 활동하게 된 진진은 살생부까지 공개해놓고 반일인사들을 암살하는 일본군과 맞서게 되지요.


영화는 할 말이 엄청 많습니다. 다루는 장르도 하나가 아니잖아요. 전쟁물에서 시작해서 첩보 스릴러 + 로맨스로 갔다가 막판엔 무술액션으로 끝나는 영화입니다. 그 때문에 영화는 온갖 이야기를 다 하면서 전력질주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진도 한 가지 얼굴만 있는 게 아니에요. 각각의 장르에 맞는 얼굴을 다 따로 가지고 있지요. 어떤 때는 경박한 플레이보이처럼 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쟁 영웅이고, 어떤 때는 가면 쓴 수퍼히어로이고, 어떤 때는... 진진이 이렇게 복잡한 인물이었나요.


이런 다채로움은 분명 재미가 있습니다. 온갖 것들이 빼곡하게 들어 있는 잡동사니 상자 같지요. 하지만 [정무문]이라는 타이틀을 단 영화의 내용으로 어울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전히 이 영화는 남의 도장에 뛰어들어 일당백으로 악당들을 때려잡는 무술영화로 끝날 수밖에 없어요. 그 쪽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죠. 하지만 앞에 펼쳐놓은 이야기 때문에 정작 클라이맥스에서는 몰입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 장면도 앞에서 계속 열거되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여전히 많은 견자단 팬들은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무문: 100대 1의 전설]은 견자단을 위한 일종의 쇼케이스죠. 무술 액션의 스타일만 해도 최소한 3종류 이상이고, 그 외에도 별별 것들을 다 합니다. 심지어 피아노도 치던데요? 원래 잘 친다고 합니다. 몰랐어요. 하지만 견자단이라는 배우의 우직하고 단순한 개성을 고려해보면, 이런 잡다함은 배우에게 큰 도움은 안 되는 것 같아요. 영화에도 마찬가지고.  (11/05/18)


★★☆


기타등등

서기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견자단이 갑자기 피아노를 치며 끼어드는 특정 장면은 [카사블랑카]의 오마주죠. 그래서 무대가 되는 클럽 이름을 카사블랑카라고 지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건 조금 시대착오적인 이름이지요. 영화 [카사블랑카]가 나오기 전에 이 지명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으니까요. 25년에도 이런 이름을 단 클럽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조금은 이상하다는 뜻입니다.

 

감독: Wai-keung Lau, 출연: Donnie Yen, Qi Shu, Anthony Wong Chau-Sang, Ryu Kohata, 다른 제목: Legend of the Fist: The Return of Chen Zhen


IMDb http://www.imdb.com/title/tt1456661/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5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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