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프롬 어스 The Man from Earth (2007)

2010.11.21 23:32

DJUNA 조회 수:21932


[맨 프롬 어스]는 SF작가 제롬 빅스비가 유작으로 남긴 각본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극장보다는 인터넷 파일 공유를 통해 유명해졌죠. 이런 영화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그런 공유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심지어 감사의 말을 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긴 이것도 영화가 비교적 저예산이어서 대규모의 홍보가 불가능한 영화였으며, 제작비 회수가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죠. 


영화는 형식적인 면에서도 흥미롭습니다. 인류의 전역사를 커버하는 장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정작 액션은 텅빈 시골집에 모인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전개되지요. SF 영화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상해보이지만, SF라는 장르를 넓게 잡는다면 오히려 당연합니다. SF는 대부분 아이디어를 실험하는 장르이고 대화는 그 중 가장 인기있는 도구지요. 영화에서는 시각효과를 통한 구경거리가 중요시되지만 꼭 그런 스펙터클에 의지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오히려 [맨 프롬 어스]가 택한 도구는 정통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시모프 소설 아무 거나 꺼내보세요. [스타 워즈]보다는 [맨 프롬 어스]에 가까울 겁니다. 


영화는 사고실험처럼 전개됩니다. 10년 동안 대학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는 동료를 위해 친구들이 모여 송별파티를 합니다. 그런데 존 올드맨이라는 이 남자는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꺼내는데, 그가 14000살 먹은 크로마뇽인이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진지하게 대응하자 심각해집니다. 그들은 올드맨의 논리를 깨려하지만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모든 질문과 공격들을 치밀하게 받아넘깁니다. 


보르헤스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척 봐도 빅스비의 각본은 [죽지 않는 인간]에 많은 걸 빚지고 있지요. 불사, 기억, 지식, 망각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영화의 태도가 허공 중에서 그냥 만들어진 건 아니죠. 하지만 보르헤스와는 달리 빅스비의 태도는 실용적입니다. 이 영화에는 구체적인 목적이 있어요. 세속적인 지식인의 입장에서 종교, 특히 기독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와 성경직역주의가 미국에서 차지하는 비정상적인 비중을 생각하면 이런 태도는 건전하고 당연한 것입니다. 


14000년 동안 살아온 남자의 입을 통해 전개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 "나는 직접 보았노라!"라는 진술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 같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존 올드맨은 몇 가지 놀랄만한 폭로를 하긴 하지만("나는 아무개였노라!"), 영화가 제공하는 정보 대부분은 지난 몇 천 년 동안 인류가 쌓아온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올드맨이 이끄는 것 같은 대화에 살을 붙여주고 흐름을 이끄는 것도 그의 동료들이죠. 그러는 동안 하나씩 던져지는 이야기들은 모두 어느 정도 교양 있는 지식인들에게는 상식적인 것입니다. 각본을 쓴 빅스비의 지식이 떨어진다는 게 아니에요. 원래 영화의 목적이 "기독교나 기타 종교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모두 상식이야. 성경말고 딴 책도 좀 읽어라, 이 바보들아!"라고 말하는 것이죠. 


[맨 프롬 어스]는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물론 스펙터클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은 갑갑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내용이 좋은 대화는 언제나 구경하기 좋잖습니까. 영화의 각본은 적절하게 호흡을 조절하며 아이디어를 즐겁게 풀어가고 있고 이 정도면 러닝타임을 빼곡하게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저예산 영화지만 배우 선정이 좋아요. 스타는 없지만 대부분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로, 대사와 대화를 어떻게 통제하는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감독 리처드 섕크먼이 이 작품에서 영화감독보다는 연극연출가처럼 작업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얼핏 연극적인 것처럼 보이는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고, 보기처럼 연극적이지도 않습니다. [맨 프롬 어스]처럼 배우들의 얼굴을 최대한으로 존중해주는 영화는 언제나 칭찬받을 자격이 있죠. (10/11/21)



기타등등

국내 수입되고 극장 개봉일까지 잡혔었는데, 결국 시사회도 안 한 모양이고, 상영한 극장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은근슬쩍 합법 파일이 풀리고... 이미 볼 사람들은 다 봤고. 아마 저처럼 돈 내고 이 영화를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걸요.


감독: Richard Schenkman, 출연: David Lee Smith, Tony Todd, John Billingsley, Ellen Crawford, Annika Peterson, William Katt, Alexis Thorpe, Richard Riehle, 다른 제목: Jerome Bixby's The Man from Earth


IMDb http://www.imdb.com/title/tt0756683/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8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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