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게, 빠르게, 아름답게]라는 제목의 테니스 영화에서 여러분은 어떤 내용을 기대하시나요.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테니스 챔피언이 되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인간승리 스포츠 이야기가 어울리겠죠. 하긴 이 영화에도 그 모든 게 다 나오긴 합니다. 다소 성의가 없어서 그렇지.

여기서 성의가 없다는 건 영화를 대충 만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영화는 이 영화의 테니스 스타인 플로렌스 팔리에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플로렌스도 이 영화에 별 관심이 없는 거 같아요. 플로렌스는 굉장한 재능이 있는 테니스 선수지만 특별한 인생의 목표도 없고 별다른 의지도 없습니다. 영화 내내 그냥 자기가 잘 하는 걸 할뿐이에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좀 얄밉게 들리는데, 영화를 직접 보면 그런 생각도 안 듭니다. 그냥 흐릿한 사람이거든요. 테니스 실력만 가지고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게 필요하죠.

당연히 관객들은 플로렌스의 주변 인물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이 사람에게 의지를 휘두르는 사람이 둘이 있네요. 하나는 플로렌스를 세계적 스타로 키우려는 엄마인 밀리, 다른 하나는 플로렌스가 은퇴한 뒤 가정주부로 안주하길 바라는 남자친구 플레처.

여기서부터 고민이 시작됩니다. 도대체 이 영화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걸까요? 그리고 도대체 이야기의 주체는 누구일까요. 아무리 단순하게 보려고 해도 [거칠게, 빠르게, 아름답게]라는 영화는 서너겹 이상의 레이어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됩니다. 존 R. 터니스라는 작가가 썼다는 원작소설의 관점, 아이다 루피노의 관점, 이 영화가 발표되었던 50년대 미국 관객들의 상식과 가치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지금 관객들에게 영화의 진행방향은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인공은 테니스에 관심이 없고 딸의 성공을 바라는 엄마는 모두에게 구박을 받습니다. 그리고 당시 영화 관객들은 딸을 통해 과한 욕심을 부렸던 엄마를 진짜 악당 취급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그게 원작소설의 관점이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 관객들은 정반대를 봅니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밀리이고 영화 전체가 자신의 야심을 스스로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세계를 살았던 한 여성이 딸을 내세워 그 목표에 도전하려다가 좌절하는 이야기 말이죠. 그리고 그게 이 영화가 공식적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보다 더 그럴싸합니다. 단지 루피노의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 이 영화가 정말 그런 의미로 만들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15/06/13)

★★★

기타등등
서울여성영화제 상영판은 사운드와 화면의 싱크가 살짝 어긋나더군요. 대사 때는 잘 모르겠는데 테니스 장면에서는...


감독: Ida Lupino, 배우: Claire Trevor, Sally Forrest, Carleton G. Young, Robert Clarke, Kenneth Patterson

IMDb http://www.imdb.com/title/tt0043619/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9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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