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는 위대한 사상가였고, 위대한 작가였지만 그와 함께 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육체의 욕구와 정신적 이상의 괴리 때문에 괴로워했던 청년 시절의 그도 힘든 사람이었겠지만, 어쩌다보니 살아있는 성인의 반열까지 올랐던 말년엔 더했겠지요. 그 때문에 전 언제나 기계적으로 위인의 '악처' 리스트에 오르는 그의 아내 소피야 톨스타야에 대해 늘 동정적이었던 겁니다. 


제이 파리니의 소설을 각색한 마이클 호프먼의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 역시 소피야 톨스타야에 대해 동정적입니다. 이게 정확히 누구의 관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호프먼의 관점인지, 원작자 파리니의 관점인지, 아니면 파리니가 주요 자료로 삼았다는 톨스토이의 비서 불가코프의 관점인지. 그리고 전 이것이 얼마나 사실과 일치하고 객관적인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전 이 영화가 톨스토이를 실제보다 견딜만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영화는 대부분 불가코프의 관점에서 전개됩니다. 모스크바에 가택연금된 톨스토이 추종자이며 비서인 체르트코프에 의해 톨스토이의 개인비서로 고용된 불가코프는 톨스토이 가족이 사는 야스나야 폴랴나로 갑니다. 거기서 그는 애증으로 부글거리는 톨스토이 부부의 결혼생활을 목격하죠. 처음부터 아슬아슬하던 그들의 관계는 톨스토이의 저작권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계획 때문에 폭발하고, 톨스토이는 결국 유명한 마지막 가출을 합니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은 예상 외로 발랄하고 신나는 영화입니다. 위대한 작가의 초라한 죽음을 다루는 영화인데도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그냥 코미디로 봐도 좋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사건들과 인물들이 풍자되고 있고, 분위기는 밝고 경쾌하니까요. 심지어 슬랩스틱의 분량도 상당한 편입니다. 


이 영화의 톨스토이는 성자 따위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도한 관심과 자기보다 더 열성적인 추종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에 가깝죠. 그와 소피야의 일상은 요새 브란젤리나 커플과 비슷합니다. 주변에 파파라치와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고 있고, 심지어 주변 친구나 동료들도 톨스토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수첩이나 일기장에 받아적습니다. 이 중 가장 우스꽝스럽고 편협한 인물로 그려지는 사람은 톨스토이보다 더 심각한 톨스토이주의자인 체르트코프입니다. 하긴 추종자가 원조보다 더 날뛰는 건 늘 있는 일입니다만.


이런 소란스러운 난장판 안에서 레프 톨스토이와 소피야 톨스타야는 놀라울 정도로 생생합니다. 둘 다 엄청난 다혈질이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부부싸움으로 시끄럽지만, 서로를 깊이 존중하고 사랑하지요. 거의 반세기 동안 같이 살면서 그 정도 열정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것도 부러운 결혼생활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적어도 헬렌 미렌과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연기한 영화 속 인물들은 그렇습니다. 그들은 진짜로 섹시한 커플입니다. 


영화는 우리가 아는 톨스토이 부부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인물들을 그려주지만, 체르트코프를 일종의 악역으로 그리면서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톨스토이 부부의 말년은 광적인 팬들과 미디어의 관심 때문에 망가졌다는 것이죠. 영화는 이런 식으로 거의 유사종교의 교주 수준에 가까웠던 톨스토이의 말년에서 보다 인간적인 인물들과 이야기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영화의 진짜 주제일 겁니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여행]은 잘 만든 영화이고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 선을 넘을 정도는 아닙니다. 사실 이건 호프먼에게 시작부터 불공평한 게임이었죠.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쓴 작가의 인생이 펼쳐지면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 수준에 맞는 내용을 기대하니까요. 러시아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어권 배우들이 연기하는 영어영화로 옮겨지면서 어색한 막이 형성되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성실하게 연기해도 흉내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10/12/03)



기타등등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이라는 번역제는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환생에 대한 영화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정 톨스토이의 이름을 팔고 싶었다면 소설 번역제인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을 따라도 되었을 텐데.


감독: Michael Hoffman, 출연: Helen Mirren, Christopher Plummer, James McAvoy, Paul Giamatti, Kerry Condon, Anne-Marie Duff, John Sessions, Patrick Kennedy, 다른 제목: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


IMDb http://www.imdb.com/title/tt0824758/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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