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케멜먼의 단편 [9마일은 너무 멀다]는 영어권 퍼즐 미스터리의 걸작입니다. 저는 그 순수한 논리와 형식, 그리고 그 밑에 숨어 있는 차가운 아이러니 때문에 이 작품을 아주 좋아해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인 니콜라스 웰트 교수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그럴싸해보이는 추론이라고 해도 꼭 진실이라는 법은 없다는 걸 증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웰트 교수는 내레이터에게 아무 문장이나 만들어내라고 말해요. 논리적 추론을 통해 그 문장을 만드는 동안에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내용을 끌어내겠다는 거죠. 그 때 내레이터가 제시한 문장이 '9마일이나 되는 길을 걷는 건 쉽지 않다. 그리고 빗속이라면 더욱 힘들다 (A nine mile walk is no joke, especially in the rain)."입니다. 그리고 웰트는 그 문장 안에서 정말로 놀라운 추리를 끄집어내지요.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해보입니다. 철저하게 언어로 구성된 작품이니까요. 주제도 소재도 언어입니다. 굳이 다른 차원이나 장르를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예상 외로 이 무의미해보이는 기획을 성공적으로 옮긴 작품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알바로 브레크너가 감독한 [9마일은 너무 멀다]예요. 물론 장편은 아닙니다. 20분짜리 흑백 단편영화죠.


브레크너의 영화는 원작에 아주 충실합니다. 대사 대부분을 소설에서 거의 그대로 옮겼다고 할 수 있어요. 추론 과정도 그대로고요. 단지 무대와 설정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이제 니콜라스 웰트는 컨벤션에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의 톨레도를 찾은 미국인 변호사이고 내레이터는 카를로스라는 친구입니다.


이 차이는 꽤 재미있습니다. 케멜먼의 원작은 평범한 미국의 소도시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은 큰 의미가 없죠. 그냥 대체 가능한 이름에 불과한 겁니다. 하지만 영화가 톨레도로 무대를 옮기자 이 낯설고 이국적인 공간은 곧 새로운 주인공이 됩니다. 웰트의 추상적인 언어와 지리 게임이 피와 살을 얻게 되는 거죠. 영화의 스페인어 영향 때문에, 보다보면 이 추리소설이 은근슬쩍 보르헤스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언어의 추상성이 가진 비현실적인 속성이 영화를 통해 보다 분명히 드러나는 거죠.


그래도 영화의 진짜 재미는 원작의 힘에 기대고 있습니다. 아까 그리 영화적이지는 않다고 했지만 그래도 재미와 논리가 풍부한 대화를 듣는 건 여전히 즐거운 일입니다. 그게 활자를 통해서이건 배우들의 입을 통해서건요. 60년도 전에 만들어졌지만, [9마일은 너무 멀다]의 대화는 즐겁고 신선하며 종종 놀랍습니다. (11/04/27)


★★★


기타등등

지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단위 문제죠. 영어권에서 9마일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미터법을 쓰는 스페인에서는 사정이 다르죠. 그리고 스페인어가 모국어인 내레이터가 그 유명한 문장을 스페인어로 먼저 읽으면 사정이 크게 달라집니다. 전 스페인어를 잘 모르지만 내레이터는 먼저 13킬로미터라고 스페인어로 말한 뒤에 9마일이라고 번역하는 것 같더군요. 그럼 곤란하죠. 이건 약간의 트릭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 같습니다.

 

감독: Alvaro Brechner, 출연: Gary Piquer, Alex O'Dogherty, Ruperto Ares, 다른 제목:Trece kilómetros bajo la lluvia


IMDb http://www.imdb.com/title/tt0368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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