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그대]라는 번역제목은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닙니다. 원제인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 자체가 서양 점쟁이들의 뻔한 레파토리니까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귀인을 만난다' 정도인데, 그것보다야 [환상의 그대] 쪽이 의미가 더 맞죠. '귀인'이라고 쓰면 제목의 로맨틱한 느낌이 죽잖습니까.


네, 진부하고 로맨틱한 제목입니다. 할리퀸 로맨스 제목으로 써도 될 정도죠. 하지만 우디 앨런의 이 영화에서 제목은 냉정한 반어법입니다. 거의 욕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환상의 그대]는 차고 야비하고 심술궂은 영화입니다. "영감, 심술보가 터졌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정도죠. 사람들이 이 영화를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앨런은 잭 오스의 나레이션을 깔며 네 명의 런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아버지 알피는 아내 헬레나와 이혼하고 젊은 콜걸과 재혼합니다. 충격을 받은 헬레나는 크리스탈이라는 점쟁이의 단골이 됩니다. 이들의 딸 샐리는 화랑에 취직했다가 고용주인 그렉에게 반합니다. 안 팔리는 작가인, 샐리의 남편 로이는 이웃집 여인 디아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되냐고요?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헬레나를 제외한 남은 사람들은 영화가 끝날 무렵 모두 지옥 문턱까지 떨어집니다. 그들과 관객들의 희망은 모두 박살나고 최악의 걱정은 현실화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영화는 뻔뻔스럽게도 관객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납니다. 어디선가 감독의 킬킬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립니다. 


영화의 주제는 명확하고 우디 앨런스럽습니다. 그는 세상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으며 우리는 그 무의미한 세계에서 돌멩이처럼 굴러다닌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걸 인식하며 좌절하는 대신 종교나 미신 따위를 믿으며 멍청하게 사는 게 차라리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관객들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런 걸 몰라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기엔 너무 자명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단지 자기 돈 내고 극장까지 와서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것뿐이죠. 이런 메시지가 보다 '예술적'으로 꾸며져 있다면 견딜만 하겠습니다. 하지만 [환상의 그대]는 이를 피가 뚝뚝떨어지는 날고기로 그냥 내놓습니다. 


저요? 견딜만 했습니다. 그리고 종종 웃었습니다. 남들이 싫어하건 말건, 가끔은 이렇게 노골적인 직설법도 필요해요. 극단적인 비관주의가 종종 그렇듯, [환상의 그대]에는 단순통쾌한 구석이 있습니다. 특히 영화가 작정하고 퍼부어대는 종교에 대한 노골적인 야유는 그렇습니다. (11/01/22)


★★★


기타등등

원래 알피가 결혼하는 콜걸 샤마인 역에는 니콜 키드먼이 나올 예정이었죠. 지금 캐스팅이 나은 것 같습니다. 키드먼은 아무리 천박하게 나와도 할리우드 배우의 아우라가 남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영화에서 루시 펀치의 캐스팅은 섬뜩할 정도로 정확합니다.


감독: Woody Allen, 출연: Gemma Jones, Anthony Hopkins, Naomi Watts, Josh Brolin, Freida Pinto, Antonio Banderas, Ewen Bremner, Anna Friel, Zak Orth


IMDb http://www.imdb.com/title/tt1182350/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74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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