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츄리온 Centurion (2010)

2010.08.21 12:21

DJUNA 조회 수:17029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로즈마리 서트클리프의 청소년 소설 [제9군단의 독수리]를 읽고 로마 제9군단의 미스터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읽으면서 되게 멋있는 전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국의 변방에서 야만인들과 싸우던 군단 하나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니 뭔가 비극적이면서 신비스럽지 않습니까. 요새는 제9군단의 실종이 서류의 분실처럼 평범한 사건에 불과했고 심지어 이들이 종말을 맞은 곳이 브리튼 섬이 아니라는 주장이 더 지지를 얻고 있다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들의 운명을 브리튼 섬과 연결시키고 싶어합니다. 


닐 마샬은 [센츄리온]에서 제9군단의 미스터리에 하나의 해답을 줍니다. 그에 따르면 이들은 스코틀랜드에서 픽트족과 싸우다가 전멸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는 그 중 평범하고 이치에 맞는 해답이죠. 제9군단을 다룬 다른 이야기들 중에는 별별 것들이 다 있습니다.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이 열리고 귀신과 괴물이 튀어나오죠. 


영화에서 제9군단의 미스터리는 이야기를 여는 도입부에 불과합니다. 영화의 내용은 여기서 간신히 살아남은 9명의 로마군들의 모험입니다. 그들은 복수의 칼날을 가는 픽트족들에 쫓겨 죽어라 달아납니다. 그 과정 중 우리가 로마사극에서 기대하는 것들은 하나씩 떨려나갑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따뜻한 기후, 목욕탕, 콜로세움, 토가, 샌달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군대가 전멸한 뒤에는 몸을 무겁게 하는 투구, 갑옷, 가죽옷들도 떨어져 나갑니다. 이들은 그냥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죽어라 달아나는 한 무리의 남자들에 불과합니다. 영화는 예상 외로 소품입니다. 


[센츄리온]은 그렇게 깊은 이야기를 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는 픽트족과 로마인들의 갈등의 원인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이야기할 수도 있었고, 주인공으로 삼은 사람들의 캐릭터를 더 깊이있게 그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대신 속전속결을 택했습니다. 이들은 영화 내내 싸우고 달아나고 반격하고 달아납니다. 가끔 은신처를 찾아 쉬고 동네 마녀와 연애질도 하고 싶지만 그래도 오래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영화가 할 것을 다 하고나면 97분이 끝납니다. 


[센츄리온]은 잔인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작인 [둠스데이]에서 보았던 요란한 장식은 찾을 수 없습니다. 칼과 도끼를 든 남자들의 전투가 펼쳐지는데 그것이 닐 마샬 식으로 리얼한 것입니다. 하긴 저런 무기를 가진 남자들이 우직하게 싸웠는데, 깔끔하기만 하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아, 이 영화에는 여자들도 두 명 나옵니다. 특히 픽트족 전사 에타인의 이미지는 주인공 로마군들을 압도할 정도입니다. 


[센츄리온]은 로마나 픽트족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는 여전히 '문명인'인 로마인의 관점을 고집하고 있고 '야만인'인 픽트족은 타자입니다. 전 영국 문화가 당시의 역사를 보는 이런 관점이 늘 신기했습니다. 웃기는 건 이런 이야기들을 옮긴 '영어로 지껄이는 로마군' 영화가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10/08/21)


★★★


기타등등

본문에서 제가 언급한 서트클리프의 소설은 케빈 맥도널드가 채닝 테이텀 주연으로 영화화 중입니다. 


감독: Neil Marshall, 출연: Michael Fassbender, Dominic West, David Morrissey, Ulrich Thomsen, Olga Kurylenko, Liam Cunningham, Imogen Poots, Rachael Stir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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