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후드 Robin Hood (2010)

2010.05.12 09:40

DJUNA 조회 수:9573

 

 

초록색 타이츠를 입고 방글거리는 에롤 플린의 로빈 후드는 잠시 잊어주는 게 좋습니다. 리들리 스코트의 로빈 후드는 플린의 발랄한 의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긴 그가 에롤 플린을 따라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답니까. 로빈 후드는 수백 년에 걸친 집단 창작의 결과물로, 성경처럼 떠받들어야 할 정본 따위는 없습니다. 브라이언 헬겔란드와 리들리 스코트가 자기만의 로빈 후드를 만들고 싶었다면 그렇게 하라죠. 잘만 만들면 그 이야기 역시 전설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가짐으로 스코트의 [로빈 후드]를 보더라도 초반에 좀 황당해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로빈 후드의 본명이 로빈 롱스트라이드이고 십자군 원정에 따라간 리처드왕의 궁수였다는 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건 케빈 레이놀즈의 [로빈 후드]에도 활용되었던 설정이고 역사적으로도 그럴싸하니까요. 하지만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그 뒤에 벌어질 이야기를 예측하는 것은 예상 외로 어렵습니다. 로빈 후드와 같은 친숙한 이름을 가진 인물의 이야기인데도 거의 현대물을 보는 것처럼 스토리 전개가 새로운 것입니다. 도대체 이 놈의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파악을 하려면 한 시간 반 정도 지나야 하지요. 그리고 아마 의도가 파악이 되는 순간 여러분은 키득키득 즐거운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영화는 지금까지 나온 [로빈 후드] 영화들 중 가장 역사에 충실합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역사책을 그대로 따랐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의 순서나 의미는 스토리 전개를 위해 적당히 개조되었습니다. 사자왕의 운명 같은 건 역사에 충실한 듯하면서도 전후순서를 따지면 오히려 더 괴상해진 느낌이죠. 필리프 2세의 역할도 그냥 지어낸 것이나 다름없고요. 하지만 정상적인 [로빈 후드]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에 새로 시작하는 이 [로빈 후드]의 이야기에서 역사의 의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큽니다. 정말 괴상할 정도로 커요. 어느 순간부터 로빈 후드는 셔우드 숲에서 귀족들을 약탈하던 노상강도에서 현대 우리 사회에도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정말로 그럴싸하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기엔 영화의 로빈 후드, 아니 로빈 롱스트라이드가 지나치게 부풀려졌죠. 그리고 그가 관련된 특별한 역사적 사건도, 당시 관점이 아닌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글래디에이터]에서 죽어가는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 황제가 막시무스에게 자신이 공화주의자임을 밝히는 장면이 기억나시려나요. 그 때 느낌과 많이 비슷합니다. 어차피 역사란 현대 관점에서 재해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리 자연스럽게 보이지는 않죠.

 

그래도 영화를 보다보면 종종 튀어나오는 우상파괴에 즐거워집니다. 아마 이 영화는 그 잘나빠진 사자심왕 리처드를 가장 개떡같이 그린 영화일 겁니다. 사실 조금 더 솔직했다면 당시 로빈 후드와 같은 산적들이 기승을 부린 건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을 위해 거둔 무리한 세금 때문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했을 텐데, 존 왕에게 역할을 주기 위해서였는지, 영화는 거기서 슬쩍 넘어가더군요. 하지만 그래도 무자비한 양민학살을 감행한 멍청한 기독교 광신도 전쟁광 리처드의 초상은 썩 그럴싸합니다. 당시 영국 사람들이 겪었던 경제적 고난이 왕관을 쓴 악당 한 명 때문이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문제였음도 분명히 밝히고 있고요.

 

이러다 보니 영화는 [로빈 후드]의 본 스토리를 벗어나 심지어 장르의 선까지 넘습니다. 명랑깜찍 노상강도 이야기는 잊으세요. 셔우드 숲의 노상강도질은 딱 한 장면밖에 안 나옵니다. 그것도 순전히 예의로 넣은 거죠. 이 영화의 진짜 장르는 전쟁물입니다. 심지어 이 드라마에서는 존 왕도 (아직) 진짜 악당이 아닙니다. 이 영화의 로빈 후드는 셔우드 숲에서 강도질을 하는 대신 군대를 이끌고 도버 해협에서 프랑스군과 싸웁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냐고요? 음, 사실 일어날 수 없긴 하죠. 그래도 리들리 스코트의 전쟁 스펙터클이 그리우셨던 분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일 겁니다.

 

다행히도 이 전쟁 이야기는 외적의 침략으로 얼렁뚱땅 위기를 넘기려는 수작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죠. 아무리 이 영화가 역사를 융통성 있게 다룬다고 해도 뼈대가 되는 기본 아이디어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 결과 영화는 완결되는 서사극 대신 우리가 알고 있는 친숙한 이야기의 프리퀄 형태로 완성됩니다. 이 이야기가 제대로 끝나려면 10여년 정도가 더 남았습니다. 그리고 전 속편이 고픕니다. (10/05/12)

 

★★★

 

기타등등

1. 영화가 가끔 그리는 셔우드 숲의 무법자들은 영화적으로 정말 매력적이라, 스코트가 이 가능성을 조금 더 파지 않은 게 화가 날 정도입니다. 이 설정과 비주얼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랬다면 그 이야기의 로빈 후드는 러셀 크로우보다 훨씬 어려야했겠죠.

 

2. 엔드 크레딧이 아주 멋지구리합니다.

 

감독: Ridley Scott 출연: Russell Crowe, Cate Blanchett, Max von Sydow, William Hurt, Mark Strong, Oscar Isaac, Danny Huston, Eileen Atkins, Mark Addy, Matthew Macfadyen, Kevin Durand, Scott Grimes, Alan Do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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