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이 난다 Letyat zhuravli (1957)

2015.04.28 23:38

DJUNA 조회 수:2636


미하일 칼라토조프의 57년작인 [학이 난다]는 스탈린 사후 전세계에 소련 영화계의 해빙을 알린 첫 번째 영화입니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첫 번째 영화이기도 하고요. 황금종려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인 46년에 그랑프리를 받은 [전환점]이라는 소련 전쟁 영화가 있긴 합니다만, 그 해는 그랑프리를 받은 영화가 11편이나 되는 해여서 별 의미는 없는 것 같습니다. 기억하는 사람도 없고.

내용은 신파입니다. 베로니카와 보리스라는 커플이 있었는데 결혼을 앞두고 전쟁이 터집니다. 보리스는 행방불명이 되고 베로니카는 보리스의 사촌 마르크와 결혼하지만 애인을 배반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소련 영화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어느 나라에서도 통할 이야기입니다.

'소련 영화'로서 영화는 이중적입니다. 영화는 일단 익숙한 소련 영화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배경, 캐릭터 설정의 전형성, 영화를 끝맺는 장엄한 대중 연설과 같은 것들 말이죠. 하지만 영화는 이 거친 틀 안에서 스탈린 시대 정치 영화들의 클리셰를 지워내고 당시 전쟁을 겪어냈던 살아 숨쉬는 사람들을 그리려 하고 있어요. 영웅도, 엄청난 악역도 없습니다. 그냥 인구의 10분의 1을 지워버린 거대한 전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있을뿐이죠. 생기없는 틀 안에서 격렬한 멜로드라마가 살아숨쉬며 꿈틀거리고 있는데 그 자체가 드라마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영화의 스타일입니다. 두 연인이 강변에서 날아가는 학을 바라보는 장면까지는 평범해보이죠. 하지만 베로니카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내려가던 보리스가 갑자기 계단을 질주하며 베로니카에게 다시 달려가는 장면에선 정신이 확 들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멜로드라마만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까지 숨죽이고 있다가 영화라는 도구를 아무런 방해없이 마음껏 이용하게 된 예술가들의 환희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그 중 일부는 정말 '어떻게 찍었지?'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현란한 테크닉을 과시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영화적 경험이 모여 정말 환상적인 러시아적 로맨티시즘을 빚어낸다는 것입니다. 후반 철도역 같은 건 거의 [안나 카레니나] 오페라예요. 결말은 다르지만.

이 로맨티시즘의 중심에는 주인공 베로니카와 배우 타티아나 사모일로바가 있습니다. 영웅 따위는 당연히 아니고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 때문에 더욱 감정이입이 쉽죠. 그리고 당시 러시아의 오드리 헵번으로 불렸던 타티아나 사모일로바는 전후 소련이 낳은 최초의 국제적 스타였습니다. 소련 영화에서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진짜 스타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당시엔 놀랍고 상징적인 현상이 아니었을까요. (15/04/28)

★★★☆

기타등등
1. [안나 카레니나]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사모일로바는 이후 정말 안나 카레니나를 연기했었지요.

2. 보고 있으면 프랭크 보재기의 [제7의 천국] 생각이 나요. 전쟁으로 갈라진 연인들이라는 소재도 닮았지만 아파트 계단의 활용이나 카메라 워크처럼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는 부분이 많아요.


감독: Mikhail Kalatozov, 배우: Tatyana Samoylova, Aleksey Batalov, Vasiliy Merkurev, Aleksandr Shvorin, Svetlana Kharitonova, Konstantin Kadochnikov, Valentin Zubkov, 다른 제목: The Cranes Are Flying

IMDb http://www.imdb.com/title/tt0050634/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2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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