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관 (2008)

2010.02.25 14:32

DJUNA 조회 수:7464

 

어렸을 때 어린이 문고로 읽었던 니콜라이 고골리의 [비이]에 매료된 영화감독이 있다고 칩시다. 그는 그 소설을 충실하게 각색한 영화로 만들고 싶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우크라이나를 무대로 한 이 이야기가 우리나라의 시공간에 이식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 가서 현지 배우들을 기용해 영화를 만드는 것인데, 감독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감독 박진성은 이를 예술적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든 주어진 조건 하에서 고골리의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영화를 만들기로 한 거죠. 그렇게 답을 찾아가는 동안 전혀 상상하지도 못 했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고,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그가 찾아낸 해결책은 [비이]를 테마로 한 3부작 옴니버스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배우들이 나오는 세 이야기는 모두 [비이]를 테마로 하는데, 그 활용법이나 의미가 조금씩 다릅니다. 일종의 변주곡을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우울증에 걸린 불쾌한 성격의 영화감독이 주인공입니다. 그는 [비이]를 각색한 [마녀의 관]이라는 영화를 찍으려 하는 중입니다. 어떻게 각색을 하려고 할 생각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그는 그 영화를 위해 캐스팅한 신인여자배우에게서 이상한 기시감을 느낍니다. 그러다 그는 다소 환상적인 상황에 빠져들게 되는데, 여러분은 모두 그가 그렇게 믿을 수 있는 화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겁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도그빌]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앞에 나왔던 배우들이 다시 나와 연극 버전 [비이]를 공연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배우들이 러시아 소설의 캐릭터들을 연기할 때 발생하는 민망함이 줄어듭니다. 이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 언급된 연극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이 연극은 첫 번째 이야기와 연결되는데, 여기서 완벽하게 논리적인 설명을 기대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단란주점에서 일하는 눈먼 악사가 주인공입니다. 그는 [비이] 인형극을 연습 중인 극단에 고용되어 피아노로 배경음악을 연주하게 됩니다. 이 인형극 역시 첫 번째에 언급된 그 연극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비이]보다 라프카디오 헌의 [괴담]에 나오는 어떤 단편을 연상시킵니다.

 

몇 가지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들이 모두 영화나 연극이라는 예술을 매개체로 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는 원작의 제대로 된 각색물을 낼 수 없는 감독의 심정이 반영된 우회로일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 이야기 모두 감독이 이 단편 중 가장 좋아하는 특정 장면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생 호마가 마녀를 등에 이고 하늘을 나는 장면요. 그는 이 장면을 호러보다는 소망성취가 깃든 판타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비이]의 마녀가 점점 친근한 존재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이유없는 적의의 대상이었던 게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거의 구원의 여신처럼 등장하니까요. 이 과정은 타자, 또는 미지의 대상에 대한 공포를 지우고 그를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네 번째는 그가 각색하려 하는 것이 [마녀의 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비이]의 어린이 문고판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세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인형은 정말 문고판의 삽화를 그대로 흉내내고 있거든요. 하긴 바로 그 어린 시절의 독서 경험이 이 영화를 만든 동기였을 테니까요.

 

영화는 재미있었나? 미안하지만 '아니오'입니다. 우선 호러 영화로서는 건질 게 별로 없습니다. 도입부의 오디션 테이프 장면처럼 인상적인 등장도 있지만 이 역시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제대로 작정하고 연극으로 만들었다면 재미있었을 두 번째 에피소드도 영화라는 필터를 한 번 통하자 힘이 쭉 빠져버립니다. 게다가 [도그빌]과는 달리 영화는 정말 이를 무대 실황처럼 보여줍니다. 적극적인 영화적 해석 없이 무대 주변을 맴돌뿐이에요. 세 이야기 모두 친숙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를 옮기기 위해서는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데, 영화는 각색을 위해 만들어놓은 아트 하우스 영화의 형식에 스스로 빠져버린 듯한 느낌입니다.

 

전 그래도 같은 독서 경험을 공유하고 있어서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 때 느꼈던 감정이 어떤 것인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억이 없는 관객들에게 이 사적인 독서 경험의 회상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10/02/23)

 

★★

 

기타등등

두 번째 에피소드는 3D였습니다. 하지만 시사회에서는 2D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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