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포커스 Zero no shoten (2009)

2010.03.11 01:10

DJUNA 조회 수:6808

 

(스포일러 경고를 어떻게 달아야할지 모르겠군요. 소설과 영화는 스포일러의 정도가 다릅니다. 소설에서 감추는 것을 영화에서는 거의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지요. 하여간 영화 기준으로 조절하겠습니다.)

 

이누도 잇신의 [제로 포커스]에는 마쓰모토 세이초 탄생 백주년 기념작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습니다. 일본 추리소설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를 통해 한 가지를 추측해낼 수 있습니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원작 소설 [제로의 초점]이 이미 권위가 보장된 텍스트이고 관객들 역시 이를 인정하고 극장을 찾을 것이라는 거죠.

 

그렇다고 이런 원작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이 손쉽다는 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원작의 명성을 등에 업고 지금까지 수십 편의 [제인 에어] 각색물이 만들어졌지만 아직 '걸작'이라고 할 만한 영화는 안 나오지 않았습니까? 더 비교가 손쉬운 크리스티의 소설들은 어떻습니까? 물론 빌리 와일더의 [검찰측 증인]과 같은 훌륭한 각색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크리스티 각색물들은 영화로서 그냥 평범하거나 그보다 못합니다.

 

[제로 포커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작소설은 결코 각색이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프리먼 윌슨 크로프츠의 전통을 이어받은 본격 미스터리로, 영리하고 끈기있지만 명탐정은 아닌 보통 사람이 살인사건을 조금씩 파헤치는 과정이 내용의 전부입니다. 그 뒤에는 멜로드라마틱한 사연이 있고 사회 비판의 기능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살인범을 찾는 과정 안에 머물고 작가 역시 거기서 많이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걸 영화화하는 건 쉽지 않지요. 책으로 읽는 건 재미있어요. 하지만 영화로 옮기면 정적이고 따분해집니다.

 

이누도 잇신은 이 소설을 각색하기 위해 일단 미스터리를 포기했습니다. 여전히 영화에도 미스터리의 골격은 남아있어요. 하지만 관객들은 소설을 읽을 때처럼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아요. 그럴 필요가 없지요. 캐스팅만 봐도 범인이 나오니까요. 내용상 범인이 드러나는 부분도 영화가 훨씬 빠릅니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꼼꼼하게 짜놓은 추리과정의 구성이 이로서 완전히 파괴되지요.

 

남은 건? 멜로드라마입니다. 추리소설의 구조가 부서지자, 그 밑에 숨어있던 세 여자의 멜로드라마가 떠오른 거죠. 마쓰모토 세이초가 차갑고 건조하게 그려서 그렇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척 봐도 멜로드라마 캐릭터들입니다. 신혼 중 실종된 남편을 찾으러 나선 아내, 그 남편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와 과거 양공주 출신인 여성. 물론 이들의 드라마가 4,50년대 일본 역사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클래식 할리우드 시절에 만들어진 여성영화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이누도 잇신이 의도한 것도 고풍스러운 총천연색 와이드스크린 멜로드라마입니다.

 

이런 멜로드라마를 통해 얻는 것은 분명 있습니다. 원작에서는 범행 동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심리묘사가 삭제되었던 범죄자 캐릭터가 훨씬 생생해졌고 주변인물과의 관계도 역동적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네 번째 죽음 장면은 캐릭터에서부터 심리 묘사, 진행 과정까지 거의 완전히 새로 쓰인 것이죠. 하지만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드라마를 넣으려고 해도 여전히 실종된 남자의 아내 데이코는 이들 드라마에서 주변인으로 머물 뿐이라 캐릭터간의 균형이 잘 맞지 않습니다. 회상 장면들은 종종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빠져 몰입하기 어렵고, 원작과는 달리 상당히 크게 벌린 클라이맥스 장면은 어색합니다.

 

원작에서 막연히 휴머니즘을 깐 동시대 사회 비판이었던 것이 이누도 잇신의 손에 들어가자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반 세기 전 일본을 고찰하는 이야기로 바뀌었는데, 이 역시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원작에는 없던 여성 시장 후보 이야기는 분명 드라마를 강화합니다. 이런 관점 때문에 멜로드라마의 힘이 더 강해지기도 했고요. 하지만 영화는 이 관점을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습니다. 제시되는 주제는 그리 깊이 있다고 할 수 없고 현대 일본에서 끝나는 에필로그는 그냥 의미가 없습니다.

 

[제로 포커스]는 어떻게 보더라도 마쓰모토 세이초 소설의 결정판 각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 짜여진 몇몇 인물들의 캐릭터 묘사와 그와 관련된 연기(전 가장 비중이 작었던 기무라 타에 쪽이 좋았습니다)는 시선을 끌고, 꼼꼼하게 그려진 50년대 일본의 시대 묘사도 잘 되어 있습니다. 전체보다는 부분부분이 더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죠. (10/03/11)

 

★★★

 

기타등등

1. 살인자의 캐릭터 묘사는 제가 좋아하는 모 크리스티 추리소설과 많이 닮았더군요. 스포일러라 더 건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2. 가나자와 시의 야외 장면은 대부분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에서 찍었지요. 일본에서는 당시 분위기가 남아있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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