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애듀케이션 An Education (2009)

2010.03.22 15:16

DJUNA 조회 수:11197

 

영국의 저널리스트 린 바버는 문학잡지 [그란타]에 실린 짧은 기사에서 첫사랑의 경험을 고백한 적 있습니다. 그 작품은 작가 닉 혼비와 당시 그의 여자친구였고 지금의 아내인 아만다 포시의 눈에 들어왔고, 그들은 이 기사를 영화화하기로 결정했죠. 혼비의 각본은 한 동안 '아직 영화화되지 않은 가장 좋은 시나리오'라며 한 동안 영국 영화계를 돌다가 덴마크 감독 로나 섀르피의 손에 의해 [언 애듀케이션]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죠.

 

바버의 경험담은 여러분의 눈과 귀를 열어줄만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와, 세상에는 진짜로 이런 통속소설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부하죠. 옥스포드 진학을 목표로 삼고 열공에 매진하는 16살 모범생 소녀가 다소 수상쩍은 직업을 가졌지만 세속적인 매력이 넘치며 교양있는 30대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예요. 남자는 돈을 펑펑 쓰면서 아이를 공연장이나 고급 레스토랑, 심지어 파리까지 데려갑니다. 여러분은 이들의 관계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 중반을 넘어가면 파국이 기다리고 있지요. 그것도 익숙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의 이름이 린과 사이먼에서 제니와 데이빗으로 바뀌긴 했지만, 닉 혼비는 린 바버의 경험담을 아주 충실하게 옮겼습니다. 단지 여기엔 태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린 바버는 처음부터 끝까지 냉정하고 담담해요. 이미 그 사람은 인생경험을 잔뜩 쌓은 노인네로, 십대소녀이던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엔 연상이었던 사이먼보다도 한참 위입니다. 이들의 관계에 대한 환상 따위는 처음부터 없고 이야기 전개를 위해 그런 걸 만들어낼 생각도 없죠. 하지만 혼비의 각본은 십대소녀인 제니의 입장에 몰입하고 있어요. 영화는 바버의 기사보다 훨씬 순진무구하고 열정적이고 로맨틱합니다.

 

척 봐도 순진한 어린애를 농락하는 바람둥이 남자와 그 희생자를 다룬 이야기인데, 어떻게 그게 로맨틱할 수 있냐고요? 그런데 그게 정말 그렇답니다. 둘의 감정이 생각보다 진실해서?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로맨틱함은 단순히 연애라는 좁은 영역에 머물지는 않아요. 제니는 단순히 데이빗에게 빠졌던 게 아닙니다. 실제 경험담에서도, 린은 사이먼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사이먼이 그녀에게 베풀어주었던 모든 새로운 것들에 빠졌었죠. 데이빗에 대한 제니의 감정은 사이먼에 대한 린의 감정보다 더 깊어보이지만, 그래도 의미 자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지루한 영국 중산층 사회 안에 갇혀 있던 제니는 데이빗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경험을 맛보았고 거기서 그녀가 누릴 수 있는 삶의 가능성과 마주쳤던 거죠. 그리고 영화는 이 젊은이의 열정과 흥분을 불필요한 미화나 교훈없이 스크린 위에 쏟아붓습니다.

 

이 영화의 또다른 매력은 1960년대 초반에 대한 정교한 묘사입니다. 이들 상당수는 당시 패션과 문화적 유행의 완벽한 재현입니다. 하지만 현대 관객들에겐 당시 영국이 지금과 얼마나 다른 세계였는지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특히 젊은 여성에게는 말입니다. 심지어 한국의 보통 관객들에게도 이상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는 제니 부모들의 반응 역시 이런 낡은 세계의 상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죠.

 

엠마 톰슨에서부터 알프레드 몰리나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배우들이 조연으로 진을 치고 있는 영화지만, 영화의 중심은 역시 케리 멀리건입니다. 미국 평론가들에게 멀리건은 발견이겠지만 영국 드라마에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멀리건이 얼마나 샤방샤방할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 이 배우의 호연은 뉴스가 아니겠죠. 많은 비평가들이 멀리건을 오드리 헵번에 비교하고 그건 과장이 아닙니다. 단지 멀리건에게는 손에 닿을 것 같은 현실적인 매력이 있어요. 그 때문에 제니가 느끼는 감정이 아무런 여과없이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관객들 역시 무장해제된 채 이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는 거겠지만요.

 

[언 애듀케이션]은 첫사랑의 화신과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는 역사가 시작된 뒤로 수조, 수억번은 반복되었을 진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진부한 이야기는 그를 온 몸으로 겪은 당사자의 신선한 감정과 흥분으로 채워져 있죠. 이 이야기가 익숙한 교훈으로 흐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교훈 역시 지당하고 당연한 것이니 어찌 이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10/03/14)

 

★★★☆

 

기타등등

1. 충무로 사람들의 외국어 표기에는 제가 알지 못하는 신비스러운 규칙이 있습니다. [An Education]을 [언 애듀케이션]이라고 쓰는 이유가 도대체 뭐랍니까.

 

2. 린 바버의 오리지널 기사를 읽고 싶으시다면 여기로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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