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애 (2010)

2010.03.17 09:11

DJUNA 조회 수:10715

 

[비밀애]의 초반 장면을 한 번 볼까요? 코마 상태에 빠져 있는 남편을 병원에 두고 아내가 남편의 동생을 맞으러 공항에 갑니다. 아내는 동생의 얼굴을 모르지만 그냥 막연히 형과 닮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죠. 그런 아내에게 다가온 사람은 바로 남편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둘은 쌍둥이였던 거예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아무리 성급하게 결혼한 사람이라고 해도 남편이 쌍둥이라는 건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정보니까요. 아무리 음험한 남편이 그 사실을 숨기려 해도 주변 사람들이 당연히 먼저 말을 했을 거예요. 몰랐을 리가 없죠. 그런데도 영화는 굳이 이 장면을 넣습니다. 왜? 윤진서에게 기절하는 장면을 주려고요? 전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 영화는 쌍둥이를 다룬 과장된 멜로드라마로 흘러갑니다. 이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죠. 영화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고 그 인공적인 설정을 통해 사랑에 대한 다소 추상적인 주제를 풀어가려 하고 있으니까요. 그 주제는 길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로 요약될 수 있어요. 똑같은 얼굴의 쌍둥이가 둘이 등장해 여자주인공을 헛갈리게 만든다면 이 주제는 영화 속에서 효과적으로 탐구될 수 있습니다.

 

이미 줄거리를 다 말한 것이나 다름없군요. [비밀애]는 쌍둥이 형제와 사랑에 빠진 여자 이야기입니다. 쌍둥이인지 모르고 형과 결혼했는데, 형은 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웠고 그 동안 역시 캐나다에 있다가 사고를 당해 결혼식에 오지 못했던 동생은 형을 찾으러 고국을 찾았다가 형수와 사랑에 빠지죠. 형제는 모두 조금씩 비밀을 감추고 있어서 여자 주인공을 더 혼란스럽게 합니다.

 

이 과정이 제대로 묘사했다면 [비밀애]도 재미있는 영화가 되었을 텐데. 딱하게도 결과는 의도에서 많이 모자랍니다.

 

우선 심리묘사와 그 과정을 타당하게 만드는 사건 구축이 꽝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까지 섬세한 조율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영화는 이 과정을 경치 좋은 곳에서 찍은 드라마타이즈 뮤직 비디오들을 묶은 것처럼 그립니다. 남편 옆에서 흐느끼고 있던 여자가 어느 순간부터 남편의 동생과 전망 좋은 민박집에 가 있는데, 그 흐름을 제대로 읽는 건 거의 불가능하단 말입니다. 이런 덜컹거림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갑니다.

 

그러는 동안 주제는 드라마에서 떨어져 나와 이리저리 굴러다닙니다.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 관객들이 모를 수는 없어요. 주인공들이 고함을 질러대며 관객들에게 주제를 귀에 박아주니까요.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고함을 질러야 할 정도라면 드라마와 주제의 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거죠. 영화를 보다보면 네 번의 섹스 신을 먼저 세워놓고 거기에 주제와 이야기를 억지로 끼워넣은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배우들에게 그렇게 이득이 되는 영화는 아닙니다. 일단 각본의 대사 감각이 나쁩니다. 윤진서처럼 모노톤의 단조로운 말투를 가진 사람은 쉽게 국어책 읽는 연기로 빠질 수 있는 대사들이죠. 아직도 테크닉이 위태로운 사람이라 감독의 꼼꼼한 연기지도가 필수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게 그냥 없습니다. 일인이역이라는 야심찬 연기도전을 했던 유지태도 별다른 재미를 보고 있지 못한데, 두 캐릭터들이 워낙 재미가 없는 사람들이라 역을 하나 더 맡는다고 배우들에게 특별한 이득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긴 윤진서의 캐릭터도 매력 없는 건 마찬가지죠.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다 죽어버려!"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을 지경입니다.

 

어떻게 보아도 좋은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의 책임일까요? [비밀애]는 중간에 감독이 바뀐 영화입니다. 각본을 직접 썼던 권지연은 중간에 '건강상의 이유로'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류훈이 그 뒤를 이었죠. 윤진서는 두 차례의 간담회에서 다른 영화를 두 번 찍는 기분이었다고 했고, 두 번째 감독과 의견불일치가 있었음을 고백했는데, 그렇다고 이전 감독이 그리던 버전이 더 나은 영화였을 거라는 보장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걸 꿈꾸는 건 그냥 허망하죠. 관객들이 볼 수 있는 건 완성된 결과물밖에 없으니까요. (10/03/16)

 

★☆

 

기타등등

1. 신부를 사랑하는 엄마 이야기는 도대체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군요. '금지된 사랑'으로 묶을 수 있는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메인 스토리와 전혀 연결이 안 됩니다. 임예진에게 미안해서 그냥 자르지 않고 둔 것일 수도 있겠죠.

 

2. 내용상 CG가 많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 영화죠. 쌍둥이 효과는 괜찮은데, 클라이맥스 장면의 다리 CG는 조금 어색하더군요. 

XE Login